개발독재와 벌거벗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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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혁, 시인·문화평론가

삶은 리듬을 타야 한다. 무용수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농부가 대지와 호흡하고, 어부가 풍랑과 벗하듯 속도에 몸을 맞춰야 한다. 그런데 「모던타임스」의 채플린이 컨베이어 벨트 속도에 미쳐버리듯, 속도를 조절하는 변속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쓰러진다. 한국의 ‘개발독재’가 그러했고, 제주도의 장밋빛 난개발이 그러하다.

‘개발독재’는 냉전과 분단의 상황을 이용해 국민동원과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시와 같은 개발 논리를 전개한 박정희 체제를 일컫는다. 선성장과 후분배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발전을 억압 통제하고, 일정한 경제 성장은 이루었을지 모르나 수많은 위험요소들을 축적하고 그 비용을 미래에 이전한 것이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수많은 이들을 지옥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광주 대단지 사건’은 개발독재의 전형적 사례다. 60년대 중반 이후 농촌 분해로 유입된 서울 도시 빈민들을 지금의 성남시로 이주시키기 위해 정부는 허허발판에 철거민들을 버렸다. “최소한의 정지 작업도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은 거의 아무런 생계 대책도 없이 마치 쓰레기처럼 야산, 밭이나 논 등에 마련된 천막에 가수용됐다.[……]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이물질처럼 버려진 이주 철거민들은 더 이상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거기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허물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이광일, 「근대화의 일그러진 자화상」) 거기에는 “인구가 몇십 만만 넘으면 서로가 주고받아 먹고 살 수 있는 자급자족의 도시가 된다.”(박기정, 「광주 대단지」라는 악마적 발상이 자리했다.

그런데 이때의 사건을 다룬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서 주인공은 기묘한 사건 하나를 이야기한다. 생존권을 주장하는 광주 대단지 사람들의 시위 현장에 참외를 실은 삼륜차가 들어왔다가 나자빠진다. “누렇게 익은 참외가 와그르르 쏟아지더니 길바닥으로 구릅디다. 경찰을 상대하던 군중들이 돌멩이질을 딱 멈추더니 참외 쪽으로 벌떼처럼 달라붙습디다. 한 차분이나 되는 참외가 눈 깜짝할 새 동이 나버립니다. 진흙탕에 떨어진 것까지 주워서는 어적어적 깨물어 먹는 거예요.”(181쪽) 생존권 투쟁의 현장에서 생물학적 본능의 수준으로 되돌아가버린 ‘벌거벗은 인간들’을 이야기한 것이다.

제2공항 건설을 두고 벌이는 국토부나 제주도정의 개발 논리는 독재자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현재의 공항 개선으로 항공 수용력을 감당하기에 충분하다는 ADPi보고서가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국토부와 제주도정의 정책 결정 과정의 잘못을 인정치 않는다. 오히려 성산읍에 제2공항이 들어서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공청회를 개최하고 6월 23일까지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고시하겠다며 밀어붙인다. 시민사회의 공론 조사를 거부하고, 무엇엔가 쫓기듯 가속 페달을 밟아댄다.

그들은 무엇을 노리는가? 폴 비릴리오는 『속도와 정치』에서 빠른 속도는 미덕도 악덕도 아니지만 누구나 따라야 할 강제, 강박이 되면서 파시즘적 사회를 만든다고 했다. 임기 내 성과를 통해 더 큰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려는 정치인. 그와 한통속이 된 개발지상주의자들이 행하는 파시즘적 행태 앞에서 우리는 ‘눈앞의 참외’를 집어삼키는 ‘벌거벗은 인간들’이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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