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식, 고문 후유증으로 신체장애
김명신, 청소년운동 전개에 큰 공로
김명악, 철종 때 사헌부 장령 지내
김명헌, 노령에 문과 특명 급제해
▲김명돈金明敦:1878(고종15)~?, 무오년 법정사의 항일 운동. 승려. 본관은 경주, 김응철金應喆의 장남으로 산남 안덕면 덕수리<새-당>에서 태어나 1936년 대정면 신도리<뒌-개> 로 이적移籍했다.
그는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명식金明植:1891(고종28)~1943(일제 말), 독립운동가, 언론인. 자 경덕景德, 호 송산松山 혹은 솔뫼. 본관 김해, 해미현감海美縣監 김응전金膺銓의 손자, 정의현감 김문주金汶株의 장남으로 산북 조천리<梨洞>에서 태어났다.
김명식은 향리의 사립의흥私立義興학교에서 초등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학우회 간사부장으로서 조도전대학 정경학부 2년 선배인 신익희(1892~1956) 회장을 보필하며, 또 학우회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을 도맡아 일을 했다.
그는 1919년 2·8독립선언에도 참여했다.
귀국 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해 논설위원을 역임하다가 1922년 2월에 그만두었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에 축시 ‘비는 노래’와 ‘새 봄’ 2편을 게재, 이는 제주의 첫 시인詩人 김지원金志遠(조천)이 시단에 데뷔한 해 보다 5년이나 앞선 것이다.
1922년 1월에는 박희도朴熙道에게 출판사의 설립을 권유해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창립하게 하고 이사 겸 주필로서 월간지 ‘신생활’을 발행했다.
동년 11월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글을 게재했다는 혐의로, 사장 박희도와 그의 추천으로 입사한 기자 신일용辛日鎔, 유진희兪鎭熙와 함께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이때부터 고문의 후유증으로 신체장애자가 됐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명신金明信(여):1929(일제강점기)~ 1999, 소녀운동가, 본은 김해김씨 묵동파墨洞派, 제주 삼남석유 故 장시영의 부인. 조천읍 조천리에서 김택배金宅培의 맏딸로 태어났다.
생모는 유명한 독립운동가 김시학金時學(조천)의 딸이었다.
어린 시절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부산 시내의 명문교名門校인 고등여학교(5년제) 시절을 보냈다.
이 학교는 일본인만이 다닐 수 있는 학교로서 철저한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양성하는 귀족학교였다.
이는 그녀의 아버지가 일본을 오가는 여객선旅客船 선장이었기에 입학이 가능했다.
1941년에 졸업하고 4년 만에 일본이 패전敗戰으로 그녀의 동창생들은 모두 모국으로 떠났다.
늘 말하기를 “평생 나는 좋은 동창이 많았는데 지금에는 한 사람도 없어 너무나 쓸쓸했다.”라고 술회했다.
1948년 5월 10일 바로 UN 감시 하에 5·10총선總選이 있는 그날에 부산 대교로大橋路 예식장에서 곽명선郭明善 주례 아래 신랑 장시영張時英(후일 장시영의원 원장)과 식을 거행했다.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해군준장 김영관金榮寬이 도지사로 부임, 이에 제주도의 ‘보이스카우트’과 ‘걸스카우트’ 운동을 전개했다.
그녀는 도백道伯 부인 현玄씨와 함께 조국근대화祖國近代化를 목표로 청소년운동을 전개하는 데 커다란 공로가 있었다.
한편 김영관 도백의 회고글 가운데 “장시영 원장院長은 제주도백 이전부터 인연이 깊었고, 그의 부인 김金씨는 생존 시에 나의 부인과 청소년 운동을 함께 했고, 나는 아직도 장시영씨와는 교분을 이어오고 있다. 내가 그 분과의 인연을 맺은 것은 가장 큰 행운幸運이었다. 내 아내 역시 초대 ‘제주도스카우트연맹’ 회장을 지냈다. 나의 고향은 강원도江原道 금화金化군이니 휴전선 북쪽이다.”라는 글이 있다.
▲김명악金命岳:1821(순조21)~1858(철종9), 문신. 사헌부 장령, 본관은 김해이며 김종원金宗元의 아들로 애월읍 납읍리<과납>에서 태어났다. 1857년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1854년(철종5) 조정에서는 평안도·함경도의 예에 따라 제주 별시를 시행, 조정에서 예랑禮郞 김관섭金觀燮이 시제를 가지고 와서 당시 제주목사 목인배睦仁培의 관장하에 과거를 시행, 동년 7월 문과별시에서 김명악은 갑과甲科로, 또 오승현吳承鉉이 을과乙科로, 박수룡朴秀龍(곽지)이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이때의 시제는 ‘이궐포귤유부以厥包橘柚賦’이다.
문과에 수석으로 급제한 김명악은 성균관 전적으로 배수되고 1855년(철종6)에 성균관 직강·예조좌랑·연서찰방延曙察訪(경기도 양주)·부사직을 거쳤다.
▲김명헌金命獻:1714(숙종40)~1795(정조19), 선비. 자 사충士忠, 본관 광산, 대정현 중문리<중-물>에서 김장집金章緝의 아들로 태어나 색달리 ‘주승-캐’에 살다가 작은아들이 사는 ‘원-동산’<천주교 자리>에 옮겼다.
1794년(정조18) 제주위유안핵순무按覈巡撫 시재어사試才御史 심낙수沈樂洙가 내도해 시취할 때에 문과에 7명, 무과에 10명이 급제했다.
문과에서는 책策에 2위를 한 김명헌을 특명으로 급제시켰다.
그는 당시 81세로 응시했고 책사策辭 가운데 “연연구구年年九九에 낙제삼구落第三九라“는 글귀가 있다.
그는 특별 사제賜第 했고, 나이가 많아 급제했으나 벼슬을 못해 호조참판을 증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