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성 동·서쪽을 지키는 동자복·서자복…맺어질 수 없는 사랑
끊어진 다리에서 천년이 지나도 한눈에 알아보는 슬픈 이야기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했다. 기쁠 때나 슬픔 때나 함께 하기로 약속도 했다. 어느 날 갑작스레 찾아온 이별. 산지천 물길을 가운데 두고 영영 떨어져 살아야 했지만, 비극은 두 사랑을 끊지 못했다. 묵묵히 멀리서 지켜보며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천년을 살았다. 이별은 분명 힘겹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더 큰 사랑을 위한 눈물겨운 헌신일지도 모른다. 시대를 뛰어넘는 이 사랑의 주인공은 ‘동자복’과 ‘서자복’이다.
제주성 동쪽(현 건입동)을 수호하는 석상 ‘동자복’과 제주성 서쪽(현 용담동)을 지키는 ‘서자복’. 맺어질 수 없는 아픈 인연의 영혼이 있다면, 이 모습이 아닐까. 지금도 이 지상 위에는 수많은 동자복과 서자복이 매일 매일 사랑하고 이별하고 있다. ‘심장 하나 떼어주고’ ‘살점을 발라내는’ 그리움의 고통을 견디며, ‘천 년이 지나도 한 눈에 알아볼 너’를 위해 살아내고 있다. 그런 사랑의 통증은 얼마나 뜨겁고 찬란할까. 연극인 정민자님의 시 낭송에 사랑의 멀미가 밀려온다.
언젠가 본 듯하고, 언젠가 두 손을 맞잡은 것 같다면, 인연일지 모른다. 말보다 눈빛과 심장이 먼저 알아차리게 된다는 인연. 일 년에 딱 한 번 오작교를 건너야 만날 수 있는 견우와 직녀처럼, 한 번의 만남으로 평생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하는 인연. ‘동자복’과 ‘서자복’- 그들의 그리움은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돛대도 아니달고…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라는 반달의 노랫말처럼 깊었고, 그들의 해후는 ‘라데치키 마치(요한 스트라우스/ 행진곡)’처럼 설레고 들뜬 걸음이었을 것이다. 두 곡을 리코더로 해석한 오현석님의 연주는 모두를 미소 짓게 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리움에 취해 쉬지 않고 달려온 길. 지켜보던 산지천 물길도 눈물을 쏟아내듯 그렁그렁하다. 천년동안 가슴에 묻어온 얼굴. 이토록 애잔한 마중이 또 있을까. ‘사랑이 너무 멀어 볼 수 없다면 내가 갈게…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마중/ 윤학준 시)’.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직녀에게/ 문병란 시)’. 성악가 김영곤님과 황경수님의 노래에 바람난장은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다. 이제 긴 이별에 마침표를 찍어주고 싶다. 사회자 김정희님의 아이디어로 마련된 마지막 무대. 예술가들이 각자 동자복과 서자복이 되어 긴 세월 돌고 돌아 마침내 만나게 되는 퍼포먼스였다. 바람난장은 한 마음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누구에게나 생애 가장 아름다운 한 시절이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 한때의 힘으로 평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뜨거운 시절은 바로, 사랑할 때이다
사회=김정희 해설=강문규 시=오승철 김효선 시낭송=강상훈 정민자 성악=황경수 김영곤 오능희 반주=김정숙 리코더=오현석 음향=최현철 영상=김성수 사진=채명섭 음악감독=이상철 글=김은정 장소 협조=제주시 건입동행정복지센터 (김미숙 건입동장님, 유창호 주민자치위원장님)※다음 바람난장은 제주시 우도면에서 펼쳐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