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의 아내여, 울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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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초빙교수/논설위원

지난주, 허창옥 도의회 부의장이 세상을 떠났다. 도의원보다 농민운동가에 더 익숙했던 그는, 의회마당에 둘러앉은 농민들이 그리도 좋은가, 발인 사진이 무색토록 행복하게 웃었다. 지상의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동료들을 격려하는 그의 웃음은, 제주도 카메라 기자가 선정한 ‘올해의 의원상’의 연속이었다. 상모리에서 대정 초·중·고를 나와, 척박한 흙을 끌어안고 눈물로 땅을 지켰을 뿐인데, 바로 그 농부들이 ‘고졸의 농사꾼을 도의원으로 만들어 주었다’며 파안대소하는 그. 3선을 마무리한 후에는 ‘다시 밭으로 돌아가려고 한라봉을 심었다’는 입가엔, 물은 누가 주냐는 여한이 남았다.

하지만 하늘은 불꽃처럼 살다간 그의 56년 생애 위에 마지막 봄 햇살을 한없이 비췄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인생이었다. 제주도의 존귀한 분들이 거반 모인 그 자리에서, 누구도 햇볕이 따갑다고 하늘을 가리지 않았다. 다만 슬픔에 겨워서 비어져 나오는 흐느낌 들이 파도치며 출렁이다 바다를 이뤘다. ‘농민운동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에 대정농민회를 창립해, 땀 흘려 일하는 농민들이 정당하게 대우를 받아야 한다며 농민운동의 선봉장으로 일하던 당신은, 참으로 올곧은 의지를 가진 청년이었습니다’라는 농민 대표의 축사가 가슴을 울리며 메아리쳤다.

그는 틀림없이 정의롭고 용맹스런 투사였을 것이다. 고려말에 이성계의 회유를 물리치고, 대제학 자리도 내려놓고, 망망대해 제주도로 목숨을 걸었던 입도조 송암공(허손)의 발걸음처럼. ‘자기 이익만 추구하지 말고, 청렴결백하고 공명정대하며, 충직하고 신의가 있으라’는 가훈을 곱씹으면서. ‘일방적인 WTO와 FTA의 파고로 제주농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눈물로 호소하고 치열하게 투쟁하며 가장 앞선 자리에 그가 있었다’는 농민들의 고백은, 그의 영혼이 깃들인 진실이었다.

그런데 나는, 일곱 살이 되면 밭고랑에 앉아서 김을 매야 하는 농촌이 싫었다. 손이 오그라드는 동지섣달의 보리밭과 숨이 턱턱 막혀오는 칠팔월의 조 검질, 달빛 아래서 고구마 절간을 주워야 하는 가을철의 중노동이 버거웠다. 그래서 중학교 입학식 날, 교복이 없어서 온 동네를 뒤지면서도 학교만은 가보리라 몸부림쳤다. 실업여고에 들어갔으면서도 은밀히 대학을 꿈꾸며 친구들과의 추억을 저버린 것은, 그래야만 농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어서였다.

아, 지금은 돌아가려 해도 너무나 아득해 버린 밭고랑의 기억을 참회하며, 허창옥 의원이 남기고 간 과수원을 바라본다. 거기에 그의 아내 김옥임이 있다. 그녀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감귤 부자 위미리의 꿈많은 작가였다. 그런데도 1980년대 유행어인 ‘운동과 현장’을 찾아 모슬포로 갔던 건, 그저 세상을 허허 웃으며 사람 좋게만 살아갈 뻔한 그 청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옹글 대로 옹근 옥임은 순하디 순한 창옥에게 농민운동의 동지가 되었다. 몇천 평의 땅을 빌려 감자 심고, 마늘 갈고, 포도를 수확했다. 뼈 빠지게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든 농업의 구조가, 워낙에 본전이 안되니 빚만 늘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농민회. 새벽이면 밭으로 저녁이면 농민회로, 제주시청 광장에서 멕시코 칸쿤까지, 눈물을 삼키며 치열하게 뛰었다. 그 옥임이가 지금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의 회장이 되었다.

‘아내여, 울지 말아요. 감자값이 폭락해서 도의회 뜰앞에 앉아 울던 때를 기억하세요. 당신은 국회의 앞뜰에서 농민들의 눈물을 닦아줘야 해요. 내가 죽더라도 모든 것은 잘 될 거예요’라며 투사는 아내에게 속삭이고 떠났으리. 이제 옥임이와 농업은 우리의 몫이다. 이들은 제주의 어머니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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