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6·25 도솔산 탈환 중 산화…무적해병의 신화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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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몽구, 대정군수
김몽규, 제주목사 등 지내
김무석, 법정사 항일 운동
김문규, 제주교대 초대 학장…부속초 설치
김문룡, 성균진사 시험 합격
김문숙, 대동청년단 부단장·개업의
김문성, 호국인물 100인에 올라
해병3·4기 전우회가 지난 2015년 6월 도솔산 전투 위령비를 찾아 도솔산 지구 전투 전몰용사 추모 행사를 가졌다. 김문성 중위는 1951년 도솔산 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제주新보 자료사진
해병3·4기 전우회가 지난 2015년 6월 도솔산 전투 위령비를 찾아 도솔산 지구 전투 전몰용사 추모 행사를 가졌다. 김문성 중위는 1951년 도솔산 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제주新보 자료사진
방선문에 있는 김몽규의 마애명.
방선문에 있는 김몽규의 마애명.

김몽구金夢求대정군수. 1870(고종7) 9, 성교수成喬修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731월에 떠났다.

그는 1870년 외공문外公門인 한서루漢西樓를 건립, 특히 선정을 베푼 관리라고 일컬어졌다.

그는 1871년 대정현성 안에 진수당進修堂을 중건하고 유생 강시염姜始炎이 철종 때 내도했을 때 어사 심동신沈東臣에게 진수당기進修堂記를 청하여 게시했다.

김몽규金夢煃제주목사. 1752(영조28) 12, 윤구연尹九淵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75410월에 파직되었다.

김몽규가 목사로 재임 중 옹중석翁仲石을 동··남 삼문 성 밖에 세우고, 1753년 운주당運籌堂과 관덕정을 중창重創, 당시의 옹중석은 현재 관덕정 앞에 2, 삼성혈 입구에 2좌가 있다.

도민들은 그의 업적을 기려 선정비를 세웠다.

1759(영조35) 4목사김공몽규존성대사비牧使金公夢煃待士碑가 제주향교에 세워졌다.

그의 마애명磨崖銘이 현재 방선문에 남아 있다.

김무석金武錫1897(고종37)~1960, 무오년 법정사의 항일 운동. 일명 김무석金戊錫. 본관은 경주, 김치백金致伯의 장남, 중문면 월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2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1920223일에 징역 1년 감형 조치로 출옥, 정부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문규金文奎1918(일제강점기)~1981, 교육자. 제주교육대학 초대 학장. 호는 난헌蘭軒, 본관은 광산, 산남 중문면 월평리에서 김봉옥金奉玉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성京城사범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하고 한때 초등교육에 종사하였다. 경성사범 동기 동창 고광림高光林박사와 함께 배우던 수재였다.

광복 후 그는 제주도교원양성소 교사로 재임하고 향학열에 불타 만학晩學으로 1957년 원광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전북대학 대학원을 수료하면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아 원광대학의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다.

196810월 제주교육대학이 제주대학에서 분리돼 출발하면서, 그는 초대 학장에 취임하고 재임용을 받아 8년이나 학장직을 수행했다.

1972년 학교를 현재의 위치로 이설하고 1974년 부속국민학교를 설치했으며 교육대학의 기반을 견고히 다져 초창기의 기틀을 마련했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제주도 교육위원을 지냈고, 1966년 제주도 교육회장으로 선출됐다.

1973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김문룡金汶龍1857(철종8)~1893(고종30), 선비. 자는 운거雲擧, 호는 국은菊隱, 본관은 김해이며 조천읍 조천리에서 해미현감海美縣監(충남) 김응전金膺銓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의현감을 역임한 김문주金汶株의 형이다. 1885(고종22) 성균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당대의 문사로 알려졌다.

후손 중에는 항일인사들이 많이 배출되었을 뿐 아니라 망사望士들도 많았다.

김문숙金文淑1918(일제강점기)~1972, 4·3사건을 전후해 대동청년단 부단장, 개업 의사.

그는 김태용金泰鏞과 백이화白梨花 사이에서 서귀포시 신효동<쇠둔>에서 태어났다.

194224세에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한 의사검정시험에 합격, 한림리<한수풀> 항구로 들어가 개업의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한림 생활을 청산하고 1945년 서귀포로 옮겼다.

이후 대동大同청년단에 가입, 활발한 청년 운동을 전개했다.

의사로서 콜레라 예방에 전력들 다하면서 환자들을 돌보고 특히 4·3사건 전후 대동청년단 부단장으로 혼란기의 질서 정립에 기여한 바가 컸다. 1953년에 군에 입대, 1960년에 제대했다.

서귀포에 정착, 다시 개업한 선생은 의사로서 활약하며 지역사회 발전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장남 김영창金永昌은 부업父業을 이어갔다.

김문성金文性1929(일제강점기)~1951, 호국인물, 해병대 중위. 서귀포시 신효동<-쉐돈>에서 김태용金泰瑢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문성은 1948년 서귀초급중학교를 거쳐 제주농업중학교에 편입학했다.

국방부 전쟁기념사업회 및 전사戰史편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6월 보훈의 달에 결정된 호국인물 100명을 선정, 6·25전쟁 영웅 89명 중 제주 출신 4명이 끼었는데 곧 김문성 해병 중위(도솔산 지구 전투), 강승우 육군 소위(시흥백마고지 전투), 고태문高泰文 육군 대위(한동고성지구 전투), 한규택韓圭澤 해병 상병(상귀동양리지구 전투) 등이다.

당시 도솔산 지구를 탈환하기 위한 24개 목표 중 가장 험준한 지점에 투입된 김 중위는 적의 진지 50m 지점까지 육박해 들어갔지만 목표를 눈앞에 두고 적탄에 전사했다.

김 중위의 전사를 목격한 소대원들은 총돌격을 감행, 미 해병대도 성공하지 못했던 도솔산 목표지점을 완전 탈환해 무적해병의 신화를 이룩했다.

2000년 제45회 현충일顯忠日6·25전쟁 50주년을 맞아 나라와 겨레를 위해 소중한 목숨을 바친 수많은 호국인물들의 값진 희생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미래를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2001527일 제주농업학교 총동창회 회장 김태현金泰鉉에 의해 해병 중위 김문성의 흉상胸像을 모교 한 모퉁이 전몰 제농학도 추념탑조형물 옆에 세워 그의 전공을 길이 기리게 했다.

국가보훈처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전쟁영웅으로 제주출신 고() 김문성 중위를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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