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일, 무극대도교 항일 활동 참여
김문주, 정의향교 개수 자금 보태
김문준, 일본공산당 확대·강화 앞장
김문희, 조천면장·제주읍장 등 역임
▲김문옥金文玉:1897(광무1)~1965, 일본 고베<神戶>에서 공산당의 항일 활동. 본관 광산, 김명수金明壽의 장남, 구좌읍 종달리에서 태어나 도일渡日, 일본공산당의 외곽단체 전협全協에 가담, 화학노조 효고현<兵庫縣>지부 집행부원이 되었다.
그 뒤 1932년 6월에 ‘고베시’ 위원회는 한인 단원을 검증하게 되었다.
그는 동년 10월 일경에 체포, 1933년 8월 29일 동지 고창옥(조천)과 함께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김문일金文一:1888(고종25)~?, 무극대도교의 항일 활동. 본관 광산, 김재로金在老의 아들, 구좌읍 상도리<도려>에서 태어나 한때 보천교를 믿었다.
1937년 2월경 김성인金性仁의 권유로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를 믿게 되어 핵심 신도로서 활약, 그는 1940년 12월 4일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김문주金汶株:1859(철종9)~1935(일제강점기), 무신. 명월진 만호, 정의현감.
본관은 김해, 해미현감 김응전金膺銓의 아들, 조천읍 조천리<梨洞>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 송산松山 김명식金明植의 부친, 호는 농은農隱, 1880년 무과에 급제, 1882년 6월에 고용진高龍振의 후임.
김문주는 명월만호로 1년 재임하고 1891년(고종 28) 송두옥宋斗玉의 후임으로 정의현감에 도임했다.
김문주는 1884년 첨지중추부사 재임 때 정의향교를 개수하던 중 전출되자 돈 400냥을 보태어 개수가 완료되도록 했다.
1882년 명월진의 성첩城堞 보수 및 군기 보수, 성문 중수를 완료했다.
그의 계획과 지휘 하에 동년 9월부터 시공해 11월에 끝마쳤다. 성첩 보수에 있어 체성體城 1525보步 중 315보를 개축하고 940보를 중수했다.
그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소식을 듣고 가만있지 못해, 그의 심경을 토로한 ‘을사년 겨울에 서울 소식을 듣고’라는 한시를 썼다.
※김문주의 시 ‘乙巳冬聞京報(을사년 겨울에 서울 소식을 듣고)’=當此存亡危急時:이와 같이 흥하느냐 망하느냐 위급한 때/ 艱難國步亦云遲:어려운 나라의 걸음걸이 더디기만 하구나/ 那無烈士盡忠節:어찌하여 충절을 다하는 열사들이 없으며/ (…)/ 爲我朝庭死以期:우리 조정을 위해 죽음을 기약했다네.
▲김문준金文準:1893(고종30)~1936(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 일본 오사카에서 노동운동 및 신간회와 일본공산당 당원으로서의 항일 활동.
본관은 김해, 김중진金重珍의 아들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나 1910년 3월 사립 의신義信학교 보통과 졸업, 또 1912년 제주공립농림학교 2년을 졸업했다.
1912년 4월 경기도 수원의 조선총독부농림학교(수원농림학교의 전신)에 입학, 1915년 3월 27일 이 학교 3년을 졸업,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의 직원이 되었다.
산북 화북리의 강기업康基業, 양홍기梁洪基와 더불어 사립학교 개설을 서둘러 해당학교의 교사로, 또 산북 월정리의 사립 구좌중앙교의 교사로 재임하면서 민족혼을 일깨우는 데 헌신했다.
그는 1927년 7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본在日本 조선노동총동맹 산하의 오사카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 동 동맹 오사카 노동조합 북부지방 상임집행위원이 됐다.
이어 1928년 5월에 동 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됐다.
1929년 12월 동 동맹 간사이지방협의회 집행위원장 등에 취임해 1930년 4월에 동 동맹 오사카 조선노동조합의 북부지부를 전협全協 오사카화학노조에 해소解消하고 다음 5월 하순에 동 조합을 전협 일본화학산업노조 오사카지부로 개칭, 그 책임자가 되었다.
동 지부의 선전물 뉴스 및 격문과 ‘제2무산자 신문’ 등을 배포하는 등 항일 활동을 전개하고 일본공산당의 확대, 강화를 지도했다.
결국 그는 오사카 고무공장노조의 파업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이유로 구속됐고, 1932년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아 사카이<堺>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2년 6개월 옥고 끝에 풀려나자 1935년 민중시보 발간 및 일본공산당 재건운동과 노농후원회 및 혁명가 구원회 등을 조직, 조선인 조직을 지도하면서 일본인 운동과 연계했다.
동년 6월 15일 한글신문 ‘민중시보’ 창간호를 발간, 오사카에 있는 조선인을 지원하며 민중운동·민족운동의 기관지로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인민전선人民戰線 결성에 힘쓰던 김문준은 구속 중 폐결핵이 악화되자 병보석으로 풀려나 도근산刀根山 요양소에 입원했으나 1936년 5월 26일 4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항일·노동운동의 거목이 손실되자 조선인·일본인의 노동계가 합동으로 시신을 유리관棺에 안치, 오사카시 노동장으로 성대히 엄수되면서 시가행진을 감행했다.
이에 일본 경찰과 협상 끝에 화장 후 시신을 제주도에 운구하기로 했고, 오사카전기노조에서 대리석·석주 비석을 기증하니 죽암竹岩 고순흠이 비문을 썼다.
정부에서는 200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문희金汶熙:1886(고종23)~1959, 분단시대의 행정관리. 한학자. 자 군집君緝, 호 소강小岡 혹은 복재復齋이다.
조천면 조천리<梨洞>에서 제주판관 김응빈金膺斌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5년 6월 담수계淡水契에서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를 프린트 판으로 발간, 이때에 주무를 맡아 이를 완성했다.
1902년 8월 제주목牧 주사로 공직을 출발, 1925년 제주도 서기, 1928년 5월 제주청년수양회 회장, 1937년 조천면장을 역임하고 일제 말에 제주도島의 공무원으로 재임 중 해방을 맞아 일본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 받았는데, 제주 섬에 미군의 군정을 실시한 것은 1945년 11월 9일에 제59중대가 도착하면서 비롯했다.
동 군정중대軍政中隊가 상륙한 후 일본인 도사島司는 면직되고 새로운 도사로 스타우트(Stout) 소령이 미군정청에 의해 임명되었다.
한편 군정중대가 도착할 당시까지 도사의 직권은 제주도島 농회 주사主事 김문희가 행사하고, 1946년 2월에 박경훈朴景勳이 한국인 도사로 임명돼 부임했다.
김문희는 부도사副島司격인 도사 보좌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얼마 없어 공직에서 물러나 동년 7월 9일 도내 유지 200여 명이 모여 김시학金時學의 개회사와 경과 보고로서 독립촉성국민회 제주지부를 조직, 회장에 박우상朴雨相, 부회장에 김문희, 박기봉朴基奉 외 5명이 선출되었다.
그는 1947년 9월 제2대 제주읍장으로 임명되었다.
동년 10월 제주경찰후원회를 조직할 때 고문으로 추대 받았다.
이 무렵 김문희 읍장은 식량배급 대상에서 토지소유자가 제외되어야 함을 강력히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