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리더십이 역사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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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 C&C 국토개발행정연구소 소장/논설위원

최근 현충일 추념사에서 대통령께서 일제 치하에서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 등을 이끌었으나 해방정국에서 월북한 김원봉의 공치사를 직설·언급함으로써 국민적 논란을 증폭시켰다. 그 결과 당시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임시정부를 비롯해 만주의 무장독립군의 활동과 기타 독립단체들의 활동에 대한 국민적 관심 또한 높아졌다. 특히 그가 이끌었던 의열단과 조선의용대 그리고 광복군의 역사에 대한 관심 또한 뜨겁다.

첫째로 임시정부는 현재와 같은 일반정부도, 망명정부도 아니었으나 민족의 의지와 이념적 기반 위에서 항일투쟁을 주도하는 선봉장역할을 했다.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홀대와 무시 내지 불인정 속에서 중국 각처를 떠돌아다녀야만 했던 수난의 역사도 겪었다.

둘째로 의열단은 창단단원 중에는 모험가들이 많았으며, 단원은 김원봉 단장 등 고작 13명이었다. 1920년대 활발하게 활동을 했고, 1930년대 이후에는 민족주의 급진파를 표방하는 단체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신채호가 이 단체의 독립운동의 경륜과 강령을 체계화한 일명 ‘조선혁명선언서’, 즉 의열단 선언을 집필 발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셋째로 광복군은 1940년께 2개 지대로 편제된 임시정부 정식군대로 창설됐다. 창설 1년여 만에 중국 전역에서 300여 명의 요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일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다.

1942년 4월에는 임시정부가 김원봉 주도의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으로 편입·의결했다. 그 결과 조선의용대 대원 일부가 광복군으로 개편·흡수되었다. 그 일부는 이탈했고, 나머지 81명만이 조선의용군으로 재편됐다. 1942년 5월에는 광복군 편제가 3개 지대로 개편되었고, 김원봉은 그 부사령관 겸 1지대장이 되었다.

일본 폐망 이후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광복군의 무장해제까지 요구했다. 이에 따라 광복군은 무장 해제된 채 귀국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임시정부 요인들도 개인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1946년 6월에 광복군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 그 중 일부가 국군창설에 참여했다.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의 저자 E.H.카(Carr)는 ‘실증사관’과 ‘주관주의 역사관’을 모두 비판하면서, 역사는 ‘(객관적)사실 자체에만 함몰(陷沒)되는 것도, 역사가의 주관(주관적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의 과정이자,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강변한다. 이는 특정 사관(史觀)에 입각한 역사가의 입장이나 당시의 역사적 사실 자체 또는 역사가의 주관적 판단에 절대 의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이다.

생각건대, 일제 치하에서의 임시정부를 위시한 모든 독립단체들의 항일투쟁의 역사는 우리 모두가 반면교사 삼아야 할 아픈 역사다. 누구도 그 시대를 탓할 수 없고, 누구도 함부로 그 시대를 살았던 인사들을 선별해서도 안 되는 그런 역사다.

굳이 특정인을 평가하여야 하는 경우라면, 그의 모든 공과를 비교형량(比較衡量) 하되, 정치리더십의 정치적 관점에서보다는 역사가의 전문적 관점에서 정중하게 평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역사가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얻어낸 평가 결과를 국민 모두가 선의로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점이 중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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