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반, 김만일 손자…무과에 급제
김방경, 고려 무장…삼별초군 토벌
김방순, 제주지방검찰청 검사 재임
김배현, 화북소년회·제주신간회 간부
▲김민화金玟華:1903(광무7)~1967, 제주 신인회와 야체이카의 항일 활동.
일명 김민화金民化, 본관은 김해, 김전희金琠熙의 차남, 조천읍 조천리 문독墨洞>에서 태어났다.
조천읍지朝天邑誌를 발간한 김민규金玟奎의 친형이다.
그는 1921년 제주 최초의 진보적 청소년단체인 반역자 구락부俱樂部의 창립 멤버이다.
구락부는 그를 비롯해 송종현宋鍾炫(신촌), 김택수金澤銖(일도), 한상호韓相鎬(성내), 홍양명洪陽明(성내), 강평국姜平國(성내) 등이 모여 일본의 반역자가 되는 길이 한국의 애국자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믿고 모인 단체이다.
1930년 9월 ‘제주도 사회주의 운동자 간담회’를 개최해 출범할 때 그는 조천면 대표로 참석했고, 1931년 음력 정월 초순에 제주 읍내 부태환의 집에서 김민화, 강창보, 부태환, 김한정, 김순종, 장종식 등이 모여서 ‘제주도 사회주의 운동자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조선청년동맹의 해소, 신간회의 해소, 청년동맹의 연령 제한, 농민 문제, 여성 문제, 기타 운동 방법에 대하여 협의했다.
1932년 1월 구좌면 동부와 성산 서부 일대에서 일어난 해녀 항일투쟁 때 비밀 결사 혁우동맹의 조직이 탄로되자 그는 일경에 체포당해 1933년 6월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에 집행 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일본이 패전한 직후 김민화는 동년 10월 ‘동 간담회’ 간사이 지부를 결성하고 도쿄의 운동에 호응했다.
1945년 10월 15일 일본 동경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조선인연맹 결성대회가 개최돼 임원 선출 시 김민화는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55년 8월 그는 도쿄 해방신문 부사장이 되고 이듬해 사장에 취임했다.
▲김반金磻:1629(인조7)~1698(숙종24), 무신. 흥덕興德현감. 본관 경주, 헌마공신 김만일金萬鎰의 손자, 산마山馬감목관 김대길金大吉의 장남이다. 남원면 의귀리<옷-귀>에서 태어났다.
세습 감목관으로 1652년(효종3) 무과에 급제, 1665년(현종6) 8월에 전라도 함평현咸平縣의 임치도臨淄島 수군첨절제사로, 또 1672년 첨지중추부사 겸 나주진관羅州鎭管으로, 1676년(숙종2) 전라도의 흥덕현감으로 부임해 이듬해 5월까지 재임했다.
현재 ‘임치 수군첨제’의 교지는 그의 11대 손인 김윤부金潤富가 보관 중이다.
▲김방경金方慶:1212(강종1)~1300(충렬왕26), 고려 무장이며 정치가. 본관은 안동, 자는 본연本然,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병부상서 한림학사를 지낸 김효인金孝印이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그는 1229년(고종16)에 음서로 산원겸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에 보임됨으로써 관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감찰어사에 올랐는데 우창右倉을 감검監檢하면서 재상의 청탁도 거절했다.
1248년 서북면 병마판관에 부임되어 몽고의 침공을 받자 위도葦島에 입보入保했다.
거기에서 해조海潮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10여 리의 평탄한 지형을 농사에 이용해 상당한 수확을 거두게 했을 뿐 아니라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우물이 없는 불편을 덜게 하여, 모두 그 지혜를 칭찬했다.
그는 1270년 6월에 이르러 개경 환도가 강행되자 삼별초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의 전주와 나주를 구하고 진도의 대안에서 토벌에 진력하다가 무고로 개경에 압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곧 석방되어 상장군을 제수 받고 다시 삼별초의 토벌에 힘쓰게 되었는데, 원나라의 원수 아해阿海의 후퇴를 막는가 하면, 단독으로 고려군을 이끌고 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새로 원나라의 원수로 임명된 흔도忻都와 더불어 진도를 사방에서 공격해 삼별초의 토벌에 성공했다.
이 공로로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다.
이어 탐라로 들어간 삼별초의 잔여 세력의 평정을 책임 맡아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에 임명되어 원나라 장수 흔도·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공격해 마침내 삼별초를 완전히 토벌했다.
▲김방순金邦順:1919(일제강점기)~, 지검地檢 검, 애월교 7회 졸, 김해김씨 좌정승공파, 후찬공계. 김방훈金邦勳의 아우로 애월읍 곽지리<과-오름>에서 태어나, 일찍 도일. 숙부 김창은金昌銀에 의해 중등학교를 우수하게 졸업, 줄곧 숙부의 도움으로 일본 리츠메이캉<立命館>대학 법과 졸, 해방 직후 귀향,
그는 미美군정 시에 실시한 ‘임시법관 채용시험’에 합격, 제주지방검찰청 검사로 재임 중에 4·3사건 당시 이재만李才萬(신엄), 법원 사무국장 송두헌宋斗鉉(금성)과 함께 의문사疑問死로 요절夭折했다.
▲김배현金培玹:1906(광무10)~1948(미군정기), 독립운동가. 제주청년회 화북지부 항일활동. 본관은 김해, 김성순金盛順의 아들로 제주시 화북리<벨도>에서 태어났다.
1925년 9월 23일 제주소년연맹회가 창립돼 화북소년회를 지도하던 김배현은 소년연맹회의 집행위원으로 피선됐다.
또 중앙에서 1927년 민족 단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자 제주지부의 간부로 활동했다.
1929년 5월 하순 화북리의 청년회원들에 의해서 화북교禾北校의 교사 문모文某가 문제가 있다고 보아 배척 운동을 일으켰다.
동년 6월 26일 밤 청년회원 김배현, 신대유, 김윤옥 등은 화북소년회 회원 10여 명을 모아놓아 문모의 문제점을 청취하고 교사 문모가 학생 김필규金必圭를 때린 데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또 청년회원들은 문文 교사로 하여금 지상에 사과문을 요구했다.
경찰에 밀고가 되었는지 신대유, 김윤옥, 김배현 등은 체포되어 1929년 7월 29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각기 징역 6월을 선고받아 항소, 동년 11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