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계몽운동에 앞장선 신여성…도민에 민족의식 심다
(93)계몽운동에 앞장선 신여성…도민에 민족의식 심다
  • 박형준 기자
  • 승인 2019.07.0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병랑, 제주 야체이카 운동 참여 
김병로, 제주향교 반수 등 역임해
김병목, 日 계림동지회 항일 활동
김병영, 제20대 제주검찰청 지검장
김병선, 출가 해녀 도일(渡日) 안내자
김병수①, 제주판관·사헌부 장령 도임
김병수②, 4·3사건 당시 세화리 이장
김병옥, 日 효오고 공산당 항일 활동
김병욱, 병풍·족자 글씨로 필명 떨쳐
지난 1월 12일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 일원에서 열린 ‘제87주년 제주해녀 항일 운동 기념식 및 제25회 기념대회’에 참가한 해녀와 참가자들이 일제의 부당함에 맞서 일본 도사(島司)에게 항의하는 모습을 재연했다. 여성 항일인사 김병랑은 제주해녀 항일 운동에 가담했다. 제주新보 자료사진
지난 1월 12일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 일원에서 열린 ‘제87주년 제주해녀 항일 운동 기념식 및 제25회 기념대회’에 참가한 해녀와 참가자들이 일제의 부당함에 맞서 일본 도사(島司)에게 항의하는 모습을 재연했다. 여성 항일인사 김병랑은 제주해녀 항일 운동에 가담했다. 제주新보 자료사진

김병랑金炳娘여성 항일인사, 애월면 애월리<하물>에서 태어나 주변 환경과 문창래文昌來 면장의 영향을 받아 항일抗日 의지가 강한 여성이었다.

1931515일 애월리 김원희金元熙 집에서 강창보姜昌輔, 신재홍, 오대진吳大進, 이익우李益雨 등이 모여 강창보의 제의에 의해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를 조직, 이때 참가한 유일한 여성은 김병랑金炳娘(애월) 뿐이었다.

그녀는 신식 여성으로서 도내 여성단체에 가입해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녀는 제주해녀 항일 운동에 가담, 19323월 이런 일이 탄로綻露나서 일경日警에 의해 운동가들이 대거 체포돼 심문을 당했으나 애월리 김주흡金仲洽과 함께 불기소不起訴 처분을 받아 풀려났다.

김병로金炳潞문사, 호는 백헌栢軒, 본관은 광산. 이호리<->에서 살았으며 제주향교 반수班首를 지냈다.

김병로의 시 題烈婦光山金氏閭(열부 광산 김씨 정려에 씀)’=吳門烈婦姓吾金오씨 집안 열부는 우리네 김씨/ 殉節靑年好德音젊은 시절 순절해 덕음을 남기었네!/ 從子那知非所欲아들을 따르는 일 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致身方覺是安心죽는 일이 오히려 편안한 일임을 깨달았기로/ 漢朝恩命淸風穆조정에서 정려해 맑은 바람 일으켜/ 梁氏芳隣白日臨이웃에 양씨 열녀 꽃다운 이름 함께 높아/ 尙有慈孫修舊蹟후손들 번창해 옛 자취 다시 밝혀/ 碑閣淨掃綠苔侵비각에 낀 이끼 깨끗이 쓸고 닦네!

김병목金丙穆1919(일제강점기)~1955, 일본 계림鷄林동지회의 항일 활동. 본관은 김해, 김순용金淳容의 아들, 조천읍 신흥리<->에서 태어나 오사카로 건너갔다.

김병목은 1934년 고향에 포시시布施市에 있는 일신日新상업학교에 입학해 3학년 3학기 때 신경쇠약으로 자진 퇴학했다.

그 후 낭화浪華상업학교 야간부 및 일본대학 대판전문학교 야간 법과 특과에 단기간 재학했으나 중퇴했다.

김봉각의 지령에 따를 것 등을 행동 신조로 삼아 각자 책임 부서를 맡게 되었다.

그는 19421021일 징역 16월을, 선고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 일본에서 조총련朝總聯에 관여하다가 사망하고 부인은 북쪽으로 넘어가 동토凍土의 쓰라림을 겪었으리라는 것이 강금종姜金鍾이 필자 남헌南軒에게 전화로 들려준 과거의 증언이다.

김병영대구공립상업학교, 일본 중앙대학 졸. 1회 조선변호사사험 합격.

대구고검 검사(1962), 20대 제주지방검찰청 지검장(1970.8~1971.8), 감사원 감사위원(1971).

김병선金丙先출가出嫁 해녀海女의 첫 도일渡日 안내자, 본관은 김해, 구좌읍 김녕리<김년포>에서 태어났다.

김병선의 안내를 받은 해녀들은 1903(융희1) 여름 일본 수도 도쿄 미야케-지마’<三宅島>로 도착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일본인 학자 桝田一二의 기록).

해녀들에 이어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자본가와 결탁해 방직공장으로 도일하는 출가 여인이 매우 많았다.

김녕리 마을 김병선金丙先도 이런 일로 부를 쉽게 형성해 남들이 부러워했다.

김병수金炳洙①:1836(헌종2)~?, 문신. 제주판관. 제주성안에서 출생하고 자 경문景文, 본관 경주, 석교錫敎의 아들, 진사 김양수金亮洙와는 재종형제지간이다.

1863(철종14) 전시 문과 별시에서 병과로 급제, 1869(고종6) 12, 이재정李載貞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87112월에 사헌부 장령을 제수를 받아 떠났다.

1880(고종17) 경상도의 웅천현감熊川縣監(현 창원昌原)으로 재임 중 동년 10, 송상순宋祥淳의 후임으로 제주에 재차 도임했으니 판관으로 재임하던 1871년 여름 신미훼철령辛未毁撤令에 의해 삼성사·귤림서원·영혜사·향현사·송죽사·의사묘등이 모두 철향撤享되었다.

이에 앞서 본도에 임술민란(일명 강제검난)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1863(철종14)에 제주 안핵겸찰리사濟州按覈兼察理使 이건필李建弼을 본도에 파견, 과장을 개설해 문과에 5, 무과에 38명을 시취할 때 그도 문과에 급제, 경상도 웅천熊川과 전라도 삼례參禮의 수재守宰를 역임했다.

김병수金炳洙②:세화리 이장. 제주43사건 당시 다랑쉬사건 증언자.

다랑쉬에서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자 제주경찰서에서도 진상 파악에 나섰다.

수사관들은 현장 조사와 현지 탐문을 통해 당시 다랑쉬 사건에 관련이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고 그들의 진술도 받을 수 있었다.

다랑쉬 사건에 대해 진술을 남긴 사람은 종달리의 채정옥, 오지봉, 세화리의 함만실, 김병수 등 네 명이었다.

이들 네 명은 다랑쉬 사건이 발생하던 날 현장에서 사건 목격자들이었다.

김병옥金秉玉1909(융희3)~?, 일본 효오고<兵庫>현에서 공산당의 항일 활동.

본관 김해, 김언수金彦洙의 장남으로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고베<神戶>시 임전구林田區에 살면서 전협全協 일본화학노조 및 당원임이 판명되었다.

1934719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되었다.

김병욱金炳旭서예가. ‘제주-목안사람으로 처음 이름이 표석豹石이어서 흔히 아호雅號표돌이라고 불러 속명으로 썼다.

필명筆名이 뛰어나 널리 알려져 한때의 병풍서와 족자 글씨가 그의 솜씨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의 글씨로는 고득종高得宗을 으뜸으로 보며 다음은 김양필金良弼을 꼽았다.

다음으로 오점吳霑, 김용징金龍徵 등이 해서楷書에 뛰어나고 추사의 문하생 박계첨朴季瞻, 김구오金九五를 높이 평가하였다.

끝으로 표돌의 글씨인데 추사의 필법을 본받아 필세가 뚜렷해 추사와 견줄 만하나 아직 숙달이 덜 되었을 뿐이라고 심재心齋는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