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치기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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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학생 때, 버스 간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적이 있다. 누님이 시내에 사는 계주에게 전해 달라 한 곗돈을 봉투째 털린 것.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토막잠을 자다 검은 손에게 당했다. 차에서 내려 무심코 뒷주머니에 손을 얹었더니, 손끝이 허했다. 그 순간, 옆에 끼고 있던 자취생의 보리쌀 자루가 땅 바닥에 나뒹굴었다. 얼마나 허탈했던지 그 일이 여태 지워지질 않는다.

그 후론 한 번도 소매치기를 당해 본 적이 없다. 대처에 나가면 주의하느라 긴장한다. 길 가면서도 손으로 안쪽 호주머니를 툭툭 쳐 본다. 트라우마가 경계심을 늦추지 않게 역할을 톡톡히 한다. 옛 기억이 잠재의식 속에 방어기제로 무장하는 모양이다.

유럽 여행 중이었다. 가이드가 수차례 주의를 환기시킨다. 런던 히드로공항에 내리면서 시작한 얘기가 프랑스를 거쳐 로마 시내를 돌 때까지 여드레째로 이어졌다. 지겹게 되감기했다. 우리나라 수준으로 알았다간 큰 낭패를 산다며 하는 말, 엄포가 아니라 ‘코 베가기’란다.

세계에서 가장 솜씨를 뽐내는 소매치기가 유럽 국가 중에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잘 사는 나라에 다 몰려 있어 유감없이 실력을 뽐낸다지 않은가. 유로화를 사용하는 27개 국 어디든 소매치기 천국으로 보면 된단다.

그들은 동양인, 그중에도 한국인을 노린다고 했다. 일본인만 해도 카드를 많이 쓰는데, 유독 한국인이 현금을 사용하는 걸 익히 알고 있어 그렇다는 것인데, 걔들이 노리는 게 우선 아이폰이라고. 반짝 내보였다간 삽시에, 솔개 병아리 채가듯 한다며 특히 여권을 조심하란다. 그걸 잃는 날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고. 서울 사람, 삼수해 자격을 땄다는 40줄의 여 가이드는 학습의 반복·강화 원리를 꿰찼다. 예시(例示)해 가며 효과를 극대화하는 스토리텔링의 달인이었다.

프랑스 소매치기 남자와 이탈리아 소매치기 여자 사이에서 출생한 아이는 재간이 천부적이라는 것. 낚아채는 데 걸리는 시간이 불과 2,3초. 가방에 손을 넣었다 하는 순간, 빼내곤 가방을 제자리로 갖다 놓을 정도로 그 솜씨가 현란하다는 것이다.

한번은 못 사는 루마니아의 조직배가 7,80명의 소매치기를 런던에 풀어 놓은 적이 있다 한다. 초등학교 5,6학년 어린 아이들, 손이 작아 쏙쏙 잘 들어갈 때라는 것.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나섰지만 성과 별무였다나.

가방을 뒤로 지면 거저 주는 것이고, 옆으로 메면 반을 이미 내준 거란 말이 과장 같지 않았다. ‘7,8초’란 말이 있다 했다. 다름 아닌, ‘7월말과 8월초’로 이어지는 관광 성수기엔 더욱 긴장하라는 경보음이었다.

큰 사건·사고가 많은 세상이라 뒷전에 밀리는 걸까, 나라가 어수선해서 그런가. 요즘 신문 방송에서 소매치기에 관한 기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 깜도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러시아워 만원 버스에서, 인파로 들끓는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IT 왕국인 건 세계가 아는 일이다. 문제는 너도나도 스마트폰에 눈 팔고 코 박고 있는 것이다. 차중에 앉아 책을 펼치고 있는 사람이 자취를 감춘 데다, 길 가면서까지 정신을 빼앗겨 교통사고의 원인이 되고 있다지 않은가.

언제 어디서든 검은 손이 번개처럼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 포획에 걸리는 시간이 2,3초다. 정신 차려야지, 당하고 나서 가슴 치면 무엇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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