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조천 3·1독립운동 기념탑 건립 비용 5억원 쾌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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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윤, 생원시 합격…글씨로 유명
김병익, 건강보험전문위원 등 역임
김병찬, 前 한라병원·한라대 이사장
김병헌, 시인·문총제주도지부장
김병훈, 신창초 교장·도정 자문위원
김복성, 병과 급제…제주목에 유배
김복태, 부호군…승마·국궁에 재능
김봉각, 일본 계림동지회 항일 활동
2016년 3월 1일 조천만세동산 일대에서 열린 제97주년 3·1절 기념식 참가자들이 3·1독립운동 기념탑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재일교포 김봉각은 1991년 1억엔(당시 5억원)을 쾌척해 조천만세동산에 3·1독립운동 기념탑을 건립했다. 제주新보 자료사진
2016년 3월 1일 조천만세동산 일대에서 열린 제97주년 3·1절 기념식 참가자들이 3·1독립운동 기념탑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재일교포 김봉각은 1991년 1억엔(당시 5억원)을 쾌척해 조천만세동산에 3·1독립운동 기념탑을 건립했다. 제주新보 자료사진

김병윤金炳胤1838(헌종4)~?, 선비. 자는 원지元之, 호는 도촌道村, 본관 김해, 제주시 이호동<백개>에서 김성범金晟範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하고 방성칠房星七의 난 때 의병을 일으킨 김남윤金南胤의 맏형이다.

그는 글을 잘 짓고 글씨를 잘 썼는데 글씨는 한석봉체를 좋아했다.

1880(고종17) 생원시에 합격해 흔히 백개 김진사라고 불리었다.

18834월 김병윤은 유학幼學 오기권吳冀權, 고치휴高致休 등과 함께 조정에 상소하기를 제주에서도 과장을 설치해 재사들을 뽑을 수 있도록 조치를 내려달라고 했다.

김병익金秉益1954~2003, 대학교수, 의학박사, 김해김씨 좌정승공파 후찬厚瓚공계, 의사 김형형金衡瀅의 손자이며 초등교장 김대수金大洙의 차남, 애월읍 금성리<모실->에서 태어났다.

김병익은 제주일중을 거쳐 72년 제주일고 15회 졸, 1978년 서울대학 의대 졸, 서울대 보건대학원 석사, 1986년 동 대학원에서 의료관리학 박사학위, 이어 한림대학 교수로, 1991년 캐나다 앨버타주립대 방문교수 1년을 거쳐 동 의대 학장보學長補2년 재임했다.

그는 1997년 성균관대 의대로 옮겨 동 대학 사회의학社會醫學교실 주임교수, 2002년 대통령 직속 의료제도발전 특별위원회 건강보험전문위원을 지냈고 기타 각종 전문정책 자문에 참여했다.

특히 흥사단興士團 투명사회운동본부 발기인’, 한국사회보장학회 부회장 등 폭넓게 활약했다.

미망인은 화가 이청수李淸樹, 시카고에서 건축학 박사를 취득한 아들 김홍석金弘晳과 딸을 두었다.

저서로는 한국의료보장연구’, ‘예방의학과 공중보건’, ‘의료보험 관리운영과 보험재정등이 있다.

필자의 변 : 제주일고 재직 중에 특히 흥사단 아카데미 회원으로 매우 가깝게 만날 수 있었다. 제주도의 흥사단은 일고의 학생주임 정옥두鄭玉斗(상도), 연구주임 신홍식申弘湜(광령), 교무주임 김찬흡金粲洽(곽지) 3인이 제주로 유치해 창시한 민족부흥단체이다. 김군의 조부는 의생醫生으로서 나의 선친과 한남시우회漢南詩友會 회원이었다.

김병찬金柄贊1933~, 서울대학교 이과대학 졸.

서귀포시 효돈 출신, 전 한라병원제주한라대학교 이사장.

김병헌金秉憲1917(일제강점기)~1989, 시인, 문총제주도지부장, 제주읍 내도리<-도그내> 태생으로 제주-성안에서 오래 살았다. 그는 1937년 광주사범을 졸업한 후 전라남도 진도珍島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84·3사건 때는 제주신보 전무專務, 1959년에는 문총文總제주도지부장을 각각 역임했다. 김병헌은 19461신생에서 시 바다의 사색을 발표했다.

김병훈金秉勳애월읍 애월리 출신. 제주농업학교 졸업.

그는 신창국민학교 교장, 애월면의회 의장, 북제주군교육위원, 제주도정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병원장 김상우와 제주시 교육장 김상호의 선친.

김복성金復性1812(순조12)~?, 문신. 유배인. 자는 대정大亭, 본관은 청풍이며 경기도 과천에서 김동구金東九의 아들로 태어나 1875(고종12) 식년문과 전시에서 병과丙科로 급제.

초시와 별시에 응시할 때 거주지가 과천인데도 경상도 승천昇川이라고 썼기 때문에 이 사실이 예조에 보고돼 태형笞刑을 받고 제주목으로 유배됐다.

4년 뒤에 그는 유배에서 풀려 복과復科되면서 관리로 등용, 승정원 주서·선전관 등을 역임했다.

김복태金福泰1717(숙종43)~1765(영조41), 무신. 부호군副護軍, 본관 광산 구좌읍 세화리에서 사헌부 감찰 김계흥金繼興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1739(영조15) 이정무李廷茂 30명과 함께 무과에 급제, 군기보수에 공을 세워 관직이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본시 재질이 뛰어나고 말타기·활쏘기에 특별한 기량을 발휘했다.

김봉각金奉珏1921(일제강점기)~1999, 일본 계림동지회鷄林同志會의 항일 활동. 사업가. 본관은 김해, 김광수金光洙의 장남, 조천읍 신흥리<->에서 태어나 후일 이름을 봉각奉角으로 표기.

그는 일본대학 부속 오사카전문학교 특과 야간부에 입학해 낮에는 일본생명보험회사의 외무사원으로 일했다.

김병목, 강금종과 함께 조선청년의 나아갈 길은 오직 조국 독립과 민족 해방을 위하여 헌신하는 길이다라고 했고, 항일 비밀결사 흥아興亞연구회를 조직, 이듬해 이를 계림동지회로 개칭했다.

조선 독립운동을 기도하던 중 동지 강금종, 한만숙, 고봉조, 김병목, 부임전 등과 함께 체포됐고, 그는 194299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6월을 선고받았다.

조국이 해방되자 귀향해 조천면 인민위원회 위원과 조선 민주청년동맹 조천면 부위원장을 지낸 후 19464월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다.

오사카에서 사업을 하면서 재일조선인연맹 오사카 본부 상무로, 19493월 재일조선민주청년동맹民靑 중앙본부에 소속되었다.

조련·민청이 해산되자 일본 공산당에 입당, 또 재일민전在日民戰에 소속 신조선사의 사원, 19555월까지 정치 활동을 했다.

1958년 재일본 도쿄상공회 상무로 17년 간 재임, 1988년 자서전 현해탄을 넘어서일어판을 출판하면서 조총련朝總聯에서 이탈했다.

그는 19911억엔(당시 5억원)을 쾌척해 조천 만세 동산에 조천 3·1 독립운동 기념탑을 건립했다.

이러한 그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19913월 조천만세동산에 김봉각 선생님 공덕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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