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를 벗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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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선천성인지 시각장애로 인한 후천성인지 나는 보통 사람보다 공간인지능력이 많이 모자란다. 몇 번 다닌 길도 생소하게 느끼고 복잡한 곳에선 여러 번 다녔어도 헤매기 일쑤다.

자신 없는 곳으로 차를 몰 때면 스마트폰의 티맵을 이용한다. 아는 샛길을 지날 때도 ‘경로를 벗어났습니다’란 말을 종종 듣는다. 방향을 바꾸라는 네비게이션의 말을 무시하고 달리노라면 제대로 안내가 이어진다. 여러 갈래로 나뉘면서 길은 길에 연하여 어디선가 만나게 마련이다.

정신적 길은 물리적 길보다 훨씬 더 복잡다기하다. 다져진 길도 있고 새로 나는 길도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길 위에 길을 내며 걷는다. 닮은 생은 있어도 같은 생은 없지 않은가. 그게 태어난 이유이며 존재의 가치인지 모른다.

경로 이탈은 목표를 전제로 한다. 지나야 할 길을 벗어남이니 시간의 뼈대에 이상이 생긴 꼴이다. 시간은 우리에게 과정만을 살게 한다. 그래서일까.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람으로서 마땅한 경로가 크게 벗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것이.

며칠 전에는 보이스피싱의 목구멍까지 들어갔다가 탈출했었다. 스마트폰에 난데없는 웹 발신 메시지가 떴다. 삼성지펠김치냉장고 값으로 칠십만 천원이 결제 완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혹시나 해서 아내에게 냉장고를 샀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사실 없단다. 냉정함을 잃고 상황을 확인하려 발신자 번호로 전화를 건 게 미끼를 입질한 발단이었다.

나긋한 여성 목소리가 성명과 생년월일을 확인하고는 어디론가 확인하는 듯하더니 틀림없이 신한카드로 결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물건을 사지도 않았고 그런 카드도 없다고 하니, 누군가 내 개인 정보로 카드를 만들어 사용한 모양이라 하질 않는가. 순간 정신이 노래졌다. 피해가 없도록 그 카드의 사용을 정지시키고 상품결제도 취소되게 돕겠단다. 그렇게 고마울 수가. 나는 미끼를 깊숙이 문 채 사이버수사대에 신고하자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고 말았다.

얼마 후 수사대의 남성 목소리와 통화가 시작되었다. 지난 2월 서울 청담동에서 내 명의로 카드가 발급되었다고 한다. 혹시 신분증 같은 걸 잃어버린 적이 없었느냐며 그새 선생님 명의의 카드가 범죄에 이용되었을지 모르니 물음에 자세히 답해 달란다. 거짓말을 하면 처벌 받을 수 있다며 은근히 겁도 준다. 제주에 살고 있어 그때 서울에 간 적도 없고 모 은행 카드만 사용하고 있으며….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 앞서 나갔다. 선생님처럼 카드 도용으로 피해를 보면 금융감독원에 재산보호신청을 하실 수 있으니, 이제부터 메모하면서 잘 대답하라며 질문이 이어진다.

그쯤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화금융사기구나. 내가 이렇게 어리석었던가. 다른 사람 이야기라면 몇 마디에 눈치 챌 수 있지 않겠냐며 나무랐을 테지만 막상 주인공이 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런 걸 이르려고 무지몽매란 말이 생겨난 것 같다.

땀 흘리지 않고 남의 등골 빼먹으려 궁리한다면 경로를 크게 벗어난 사람이다.

요즘 우리 사회를 생각할 때면 마음이 편치 못하다. 사람을 표방하면서 갈기갈기 찢어 놓는 짓, 아무래도 경로를 벗어난 탓이다.

사랑의 출발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찾는 일이 아니라 다름을 수용하는 마음이라 한다. 무더위가 코앞이다. 사람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큰 나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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