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日製), 일제(日帝)
일제(日製), 일제(日帝)
  • 제주신보
  • 승인 2019.07.1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길웅. 칼럼니스트

60년대를 돌이키니 쓴웃음이 난다.

못 살던 때, 연필이 닳아 몇 센티, 심만 남아 있으면 그걸 탄피 같은 데 끼우고 썼다. 침을 바르며, 몽당연필을 최후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 시절, 소년이 제일 부러웠던 게 있었다. 일제 ‘돔보(잠자리)’ 연필과 ‘에노구(물감)’였다. 국산 연필과 물감은 조악했다. 국산 연필은 심이 거칠어 학습장이 잘 찢어졌고, 일제 물감은 제 색을 내 채색이 선명해 고왔다.

일본에 사는 친척이 갖다 준 거라며 자랑하는 일제 옷 입은 아이를 보면 샘났다. 내가 입던, 어머니가 손수 지어 준 무명옷하고는 사뭇 달랐다. 같은 검정인데도 빛이 나고 고급스러웠다.

어른이 되고서도 일제는 국산보다 훨씬 사용에 편하고 좋았다. 손톱깎이 하나만 써 봐도 잘 깎이고 잘 다듬는다. 국산은 왠지 질겅거려 잘 잘리지도 않았다. 만년필도 천양지차였다. 국산은 얼마 못 써 펜촉이 갈라지고 나사 부분이 깨져 버리는데, 일제는 잉크의 내림이 아주 좋고 수명도 길었다. 일제는 보기만 해도 탐났다. 한마디로 일본은 높은 기술로 이용후생(利用厚生)에 한참 앞서가는 나라란 생각을 하게 됐다.

결국 머릿속에 정리된 것은 그들에게 주권을 빼앗기면서 나라 발전의 동력마저 박탈당했다는 것이었다. 이웃 섬나라 일본에게 당해 온 우리 역사가 어처구니없게 다가왔다. 말도 못하게 마음 아팠다.

70년대 산업화가 불같이 일어나 한국의 경제는 놀라운 기세로 발전하며 진화를 거듭했다. 그 초기에 섬유와 제지 그리고 인쇄 기술이 일본을 능가해 갔다. 아잇적 그토록 부러웠던 일제가 ‘국산품 애용’이란 슬로건에 묻히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한민국은 IT 강국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섰다. 핀란드 노키아를 젖히고 미국의 애플과 경합하게끔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다. 자동차도 조선도 선진국 대열에 끼어들었음은 물론이다. 한데 얼마 전, 일본 아베 총리가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에 수출 규제를 선언했지 않은가. 분명, 일제 강제 징용 보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다. 우리 대통령의 철회와 협의 요구에도, 그런 일은 절대 없다고 기세등등하다.

한일 관계가 최악의 상태로 장기화할 조짐인 가운데, 우리 국민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일제 불매에 일본 관광 안 하기 운동이 급속도로 번지는 형국이다. 마트까지 가세해, 일제를 안 팔기로 맹렬하게 맞서고 있다. 양국 간 외교적 접근 없이 한 판 힘겨루기로 가야 하는 건가.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개인적으로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내 소비에서 일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 자동차는 현대, 컴퓨터·냉장고는 LG, 에어컨은 삼성이다. 불매할 게 없어 고민된다. 실제 한국에서 일본은 상당히 지워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베가 생각하는 것만큼 일본의 생산력이 지배적이지도 않다. 올해 1분기 기준, 제조업 중간재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15.9%로 9년 전의 25.5%에 견주어 크게 축소됐다는 통계가 있다.

우리의 분노는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 않고, 아직도 제국주의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번 수출 규제가 한국을 괴롭히는 게 목적이라는 아사히신문의 보도는 충격이다. 이참에 탈(脫) 일본으로 가야 한다.

일제(日製) 하면, 일제(日帝)가 떠오른다. 그들은 씻어야 할 것을 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