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은 나무도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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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선 수필가

서울에 있는 아이를 만나러 갈 때마다 들르는 곳이 있다. 양재동에 자리한 꽃시장이다. 그곳에 가면 보기 힘든 토종 야생화들을 만날 수 있다. 외국에서 건너와 이름도 생소한 꽃들을 구경하는 것은 덤이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 딸아이와 함께 간 화원에서 삼지구엽초, 깽깽이풀, 소엽마삭 등 몇 개의 화분을 구입했다.

아이의 작은 방에 화분들을 풀어놓으니 순간 환한 꽃밭이 된다. 그때서야 제주도까지 들고 갈 것이 걱정이 되었다. 화분에서 식물체를 분리하여 신문지에 돌돌 말고, 플라스틱화분은 버리기로 했다. 이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고 있던 딸아이가 한마디 한다.

엄만 꽃 이야기를 할 때 눈빛이 반짝거리는 거 알아요?”

꽃에 대해서, 아니 식물에 관심이 깊어진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아마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들과 떨어져 지낼 무렵이었을 것 같다. 아이들이 보고 싶은 날이면 이층으로 올라가 옷 정리도 하고, 딸의 침대에 누워서 베갯속에 머리를 묻곤 했다. 잠을 이룰 수 없을 때에는 아들의 유년이 담겨있는 일기장을 읽고 또 읽었다. 아이들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리고 싶었다. 어느 작가는 막 끓인 스프가 식지 않을 거리에 자녀를 두고 싶어 했다는데, 그때 나는 비행기를 두 번씩이나 갈아타야 하는 거리에 아이들을 두고 있었다.

남편은 늘 바빴고 나는 홀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작은 마당으로 나가서 풀을 뽑으며 미안하다 미안하다라고 중얼거렸다. 작은 풀들은 비명한 번 지르는 법도 없이 묵묵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듯 했다. 나무 아래에 숨어있는 작은 꽃들과 눈을 맞추고 있을 때 아들이 전화를 했다.

엄마, 뭐 하세요?”

풀들이랑 이야기하고 있어.”

내 말을 듣고 있던 아들은 병원에 가보셔야 될 것 같다며 전화기 저편에서 싱겁게 웃었다. 보고 싶다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보고 싶다.

며칠 집을 비울 일이 있어서 남편에게 신신당부를 한 적이 있었다. 요 녀석은 물을 주지 않아도 되고, 얘는 물을 좋아하지만 잎사귀가 젖는 건 싫어하니 조심해야 하고, 요건 물을 좋아하는 아이니 하루에 한 번씩은 흠뻑 줘야 한다고. 결과는 참담했다. 아껴왔던 장수매가 말라 버렸고, 봄에 새로 들여온 팥꽃나무는 잎을 몽땅 떨궈 버렸다. 수련목은 윤기를 잃어버렸고 분홍빛의 꽃을 피웠던 열귀나무는 죽어가고 있었다. 목이 말라서 끊임없이 신호를 보냈을 그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남편은 시키는 대로 했다면서 달라진 곳이 별로 없다는 눈치다. 안타까운 마음에 직접 보라고 했더니, 어제까지는 괜찮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서둘러 그늘로 옮겨놓고 물을 채운 큰 대야에 화분째 담갔다. 그리고는 말을 걸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힘을 내렴.”

매일 이른 아침에 마당으로 나가서 시들어버린 꽃들과 나무에 눈을 맞추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일주일쯤 지나서부터는 한 두 녀석이 생기를 되찾았다. 장수매도 연초록빛의 새로운 잎이 나오고 있었다. 정말 말을 잘 알아듣는 장한 녀석들이 아닌가.

유난히 눈망울이 큰 딸아이를 가만히 바라본다. 저 깊은 눈빛을 본 적이 있다. 산 속에서 만난 짙은 보랏빛의 수국, 숨어있는 보석 같은 산수국을 닮았다. 아이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종이가방을 풀어 꽃과 나무들의 상태를 살펴본다. 다행히 별탈이 없어 보인다.

적당하게 내린 비로 마당은 온통 수국천지다. 동그랗게 눈을 뜬 꽃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와르르 쏟아진다. 짙은 초록빛깔의 나무들은 한여름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내게 말을 걸어온다. 곧 가을이 올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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