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다니던 교회
미국에서 다니던 교회
  • 제주신보
  • 승인 2019.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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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림 수필가

미국에서 결혼을 해 남편이 살던 워싱턴에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자석에 끌리듯 가까운 교회를 찾았다. 믿음이 아니다. 주중엔 미국 사람들을 상대로 살기 위해 열심히 지내다 주말에 동족끼리 어울려 우리말로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 편안함은 동족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된다.

믿음이 없는 사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기꺼이 어울린다. 한 시간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마치면 누구나 마음이 풀린다. 곧 이어 친교 시간에 먹는 한식은 모두에게 주는 기쁨의 절정이다. ‘p 가지 안되는 반찬의 그 맛은 고향 그리는 마음으로 먹기 때문에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꿀맛이라 지금도 생각난다.

1960년 대에는 워싱턴에 황재경 목사가 이끄는 교회 하나였다. 황재경 목사는 우리 전통악기를 전부 다루는 무형문화재 국보로 지정된 애국자이고 인품이 깊다. 영어도 잘해서 120명쯤 되는 한국 인재들의 돌봄이로 찾아다니시며 “별일없어? 밥먹으로 와” 이 다정한 말씀의 힘. 남편도 결혼 전 가끔 가서 고춧가루 없는 양배추 김치를 맛있게 먹곤 했다.

1970년대부터 미국이민법이 확장되여 차츰 인구가 늘면서 미국교회를 빌려 한인 교회가 여기저기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음식 냄새 때문에 쫓겨나기도 하고 안 빌려 주기 시작했다. 우리는 악착같이 교회를 사거나 짓기 시작했다. 미국은 기독교 나라이기 때문에 교단이 많아 교인이 있어 가입만 하면 교회 설립에 많은 도움을 준다. 이 일에 국제결혼을 한 분들의 도움이 컸다. 미국 남편들이 해결사로 나서주고 부인들의 적극적인 활약과 기부도 많이 했다. 부인들은 미국 가정에 힘들게 적응하면서 교회는 친정보다 든든한 뒷심이 되어 주었다. 드디어 우리 교회가 완성되어 모두가 눈물 콧물로 감사기도를 외치며 창립 예배를 드렸다. 차차 자리가 잡히면서 아이들에게 한국말과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살기 바쁜 부모를 대신해서 큰일을 했다. 또한 가족이 없어도 외롭지 않게 장례식 결혼식은 물론 돌잔치 환갑잔치 대소사를 도맡아 하면서 이민생활에 큰 도움과 활력을 주었다.

봄과 가을의 소풍은 온 가족이 함께 정말 즐거운 날이다.

한번은 강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전 교인이 소풍을 갔다. 할머니들이 슬슬 걷다가 너무 튼실하게 잘자란 마늘 밭을 발견했다. 너무 반갑고 놀라워 황급히 달려들어 뽑기 시작했다. 지나던 경찰이 당황해서 “노, 노”를 외친다. 우리나라 국화는 무궁화이고 미국의 국화는 장미인 것처럼 미국은 각 주마다 동네마다 지정한 꽃이 있다. 이 공원 동네 꽃이 마늘이기 때문에 정성들여 잘 가꾸어 놓았던 것이다. 목사님의 설명을 듣고 온 교인이 정말 미안해서 “아이엠쏘리”를 연발하며 절절매니 경찰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너희들이 이 마늘을 다시 잘 심어 놓을래 아니면 벌금을 많이 낼래.” 두말할 것도 없이 마늘을 소중히 껴안고 있던 할머니부터 전 교인이 달려들어 다시 말끔히 심어 놓았다. 경찰도 마음이 놓이는지 잘 했다고 웃으며 칭찬을 한다.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이다.

미국에 가면 고향찾듯 다니던 교회를 가게 되는데 활기찬 많은 낮선교인, 잔치상 같은 친교음식. 그러나 목사도 바뀌고 같이 다니던 교인도 이래저래 떠나고 몇 없어 쓸쓸한 회한에 잠긴다. 꿈을 갖고 같이 고생했던 옛날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