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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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미 수필가

해 질 무렵 소일하는 부부의 일상은 밀레의 만종을 연출한다. 오가며 그 광경을 자꾸만 기웃거리게 된다. 자식들을 모두 분가시킨 노부부는 텃밭의 야채들을 수시로 들여다보면서 늦둥이를 키우는 심경인가, 삼매경이다. 노년의 즐거움이 여유에서 온다는 듯 그들의 표정은 전혀 구김이 없다.

노부부가 일구는 텃밭이라 역시 실하다. 쪽파며 무, 상추가 금을 긋고 자신의 영역에서 줄을 지어 있다. 언뜻 보면 경계가 있어 무심한 듯하지만, 초록 일색이어서 동색들이다. 어느 집 화단이 이리 단정할까.

가슴은 콩닥거리고 손은 바삐 움직인다. 사자머리를 한 미인들처럼 진··미를 가려낸다. 한 움큼 뜯어내고 서둘러 텃밭을 나오는데 여전히 가슴은 뛴다. 상추를 뜯어다 먹으라고 허락을 해줬는데도 정성으로 채워진 텃밭에 자주 들어간다는 것이 미안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가슴이 뛴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 비약하면 비싸지 않게 살 수 있는 야채지만 공짜로, 그것도 매일 같이 가꾸어서 싱싱하고 실한 것을 고르는 재미가 쏠쏠한 두근거림이다. 생계를 위한 사업으로 재배한 상품이라면 감히 범접할 수 있겠는가.

상추는 어느 텃밭에서나 볼 수 있어 친근한 야채이다. 게다가 값도 비싸지 않아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평범하지만 식탁을 풍요롭게 꾸며주는 것이 상추의 보편적인 미덕이다. 상추와 깻잎, 치커리나 여러 가지 야채를 올려놓고 쌈을 먹어도 그 이름은 상추쌈이다. 야채의 주연급이다.

세팅 파마머리 같은 상추 한 잎에 삼겹살 한 점과 풋고추 한 조각, 된장을 얹어 볼이 미어지게 먹는 상추쌈. 복을 싸 먹는다고 하여 복 쌈이라고도 한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가 이 맛을 마다하리오. 이 맛에 취해 세상 시름 다 잊어버리는 최면제이기도 하다.

올려놓은 음식을 상춧잎으로 유연하게 감싼다. 부드러운 몸짓이 어떠한 것도 거부하지 않고 넉넉하게 수용한다. 반으로 쭉 찢어도 주저하지 않고 몸체의 분리를 허락한다. 이 한 몸 아낌없이 던지는 대가 없는 헌신이 입안에서 거침없이 부서진다.

자존심이 무너지는 일 앞에서는 마음을 굳게 닫아서 바늘구멍 하나라도 들어갈 틈이 있는지, 너그럽게 수용한다고 손해는 없을 터. 타협할 줄 아는 지혜가 모자란 나를 질책한다. 흐트러질까 봐 긴장되면서 뻣뻣해질 땐 수양이 덜 된 걸 어찌하랴. 한결같은 상추의 유연함에 감히 어찌 대적할까.

고려 시대 여인들이 중국 원나라에 궁녀로 끌려가 슬픔을 달래며 모국의 상추씨를 심어 상추쌈을 먹었다고 한다. 해외여행을 떠날 때 고추장을 볶아서 가는 지금의 현실은 그 시대 여인들의 한과 슬픔에 비하면 사치는 아닌지. 낯선 토양에서 무던하게 적응해 준 상추가 얼마나 고마운가.

몽골 사람들은 중국 상추보다 고려의 상추 맛이 월등하다고 평가해서 비싼 값을 치르고 상추씨를 구매했다고 한다. 상추의 별칭으로 천만채天萬菜라 불렀다 하니 이름만으로도 그 맛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몇 년 전 불면증이라는 불청객에 포위당해 시달렸다. 불면의 고통은 지난 세월을 반추하게 하는 회심의 기회가 되었다. 내 의식 속에 자리한 철없는 오만을 내려놓고 너를 돌아보라는 신의 훈육이었다. 불면으로 뒤척이는 시련 속에서 깨우침은 삶의 묘약이 되었으니 결국 감사할 일이다.

온갖 민간요법을 동원하여 불면증에서 벗어나 보려 애쓰는 동안, 그때 만난 것이 상추였으니 내게는 은인인 셈이다. 우리 집 냉장고 야채 박스에는 비상약처럼 늘 상주하고 있다.

텃밭에서 물을 주던 노부부가 또다시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 것도 빈말 같아 계면쩍게 미소만 짓는다. 이심전심이겠지, 얼른 상추를 뜯어 한 손 가득 쥐여 준다.

손에 잡히는 여린 것들이 냉큼 제 몸을 쓰러뜨리는 게 가상타 했거늘. 다음 생에는 조금 질기고 센 거로 환생하라고 동정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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