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주의의 기원과 ‘아베’의 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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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혁, 시인·문화평론가

스위스 제네바 세계무역기구 일반이사회에서 벌어진 풍경을 보시라.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가 무역 규범을 위반한 것이라고 한국 대표가 따졌다. 일본 대표는 여기에서 논의할 사안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다른 회원국들은 아무 말 없었다. 물론 미국도 조용했다. 한일 갈등의 격화 속에서 방한한 볼턴은 외교적 해법만 운운했다. 이 상황은 일본 천황을 내세운 내셔널리즘과 제국주의사상의 기초를 열었던 ‘이와쿠라사절단(1871~1873)’이 독일에 갔을 때 ‘비스마르크’의 연설을 떠올리게 했다.

“만국공법이 모든 나라의 권리를 보전하는 법전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는 소국이 이 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데 반해, 대국은 자기에게 불리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이를 무시하므로, 소국은 ‘자주의 권리’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미구회람실기』)

독일 통일 제국의 수상 비스마르크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사절단의 뇌리를 강타했다는 말이다. 프로이센 하원에서 문제 해결이 연설도 투표도 아닌 ‘철’과 ‘피’일 뿐이라 했던 ‘철혈 연설’의 연장선에 있는 말이다. 이 가르침은 일본의 근대적 개혁을 낳은 메이지유신(1868)을 이끌면서도 제국주의적 침탈의 길로 나아가는 바탕이 되었다. 그들은 복고를 표방한 신도국교화,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바탕으로 한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歲一系)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라고 규정한 1889년 메이지헌법은 천황을 주권자로 한 제국주의·군국주의 길을 열었고, 결국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몰고 왔다. 그리고 패전 후 1946년에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전쟁을 영구히 포기한다는 ‘평화 헌법’을 제정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한국에 대한 경제적 침탈을 감행하면서 전쟁 가능한 일본을 위한 헌법을 만들겠다고 한다. A급 전범을 외조부로 둔 아베는 참의원 선거 과반 의석을 차지한 후 여전히 개헌하겠단다. 그를 지원하는 우익들은 메이지헌법을 최고 헌법이라 여기며 일본의 재무장을 학수고대한단다. 그리고 48.8%의 투표율은 1945년 전후 두 번째로 낮은 기록으로 일본인들의 정치 무관심을 보여준다. 전쟁을 하겠다는데도 일본 민중은 분연히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아베는 한국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 배상 판결을 비웃으며, ‘경제왜란’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제국주의 기획자들이 우러른 비스마르크는 ‘무장한 국가와 민족’을 앞세워 유럽을 불안에 빠뜨렸다. 히틀러 제3제국 치하의 시련은 비스마르크가 앞세운 내셔널리즘과 군국주의의 연장선에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독일 민중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1929년 독일에서 반파시즘운동에 참여했던 ‘스티븐 스펜더’는 “나치의 행위 그 자체 못지않게 무서웠던 것은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 공포를 눈앞에 두고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라고 적었다.

아베 총리는 군국주의적 망상을 걷어치워야 한다. 그리고 일본의 민중이나 지식인들은 그 망상이 불러올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알고 그들과 싸워야 한다. 한국은 만국공법이 부당한 현실세계를 개선해주지 않으니 집안싸움 그만두고 온갖 지혜를 짜내야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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