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오현(五賢) 중 한 명…제주 교학 발전에 큰 공헌
(97)오현(五賢) 중 한 명…제주 교학 발전에 큰 공헌
  • 박형준 기자
  • 승인 201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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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만, 무오 법정사 항일 운동
김상빈, 문행 겸비해 사림 추앙 받아
김상언, 건국훈장 애국장 받아
김상석, 제주시재어사·교리 등 지내
김상수, 제주향교 직원·유림의 반수
김상삼, 대정현감·전적 등 역임
김상추, 학생 항일 활동
김상헌, 제주 안무어사…혼란한 민심 수습
1960년대 오현단의 모습. 오현단 일대가 새롭게 복원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오현은 제주에 유배되거나 방어사로 부임해 제주 교학 발전에 공헌한 김정, 김상헌, 정온, 송인수, 송시열 등 5명이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60년대 오현단의 모습. 오현단 일대가 새롭게 복원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오현은 제주에 유배되거나 방어사로 부임해 제주 교학 발전에 공헌한 김정, 김상헌, 정온, 송인수, 송시열 등 5명이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삼만金三萬1862(고종32)~?, 무오년 법정사의 항일 운동. 김삼만은 산북 삼도리<제주-성안>에서 태어나 산남 중문면 도순리<-숭이>에 옮겨 살면서 법정사의 인부로 노동일을 맡았다.

후일 봉기군의 후군대장後軍大將이 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상빈金尙斌1769(영조45)~1818(순조18), 선비. 서예가. 본관 광산, 제주시 오라동<오라위>에서 김명려金明麗의 아들로 태어나 문행文行을 겸비하고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문장을 잘 짓고 또 필원筆苑으로 널리 알려졌다.

김상언金商彦1875(고종12)~1965, 무오년 법정사의 항일운동. 승려. 본관은 김해, 일명 김읍언金揖彦, 산북 외도리<-도그내>에서 태어나 그는 19192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아 대전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형량이 3년으로 감형됐다.

정부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상석金相奭1690(숙종16)~1765(영조41), 문신. 제주시재어사試才御史. 본관은 연안, 자는 군필君弼, 호는 시은市隱. 시호는 정간貞簡,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현손이다. 1718(숙종44)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정언을 지냈다.

또한 그는 교리·부수찬·의주부윤·강화유수·한성부우윤을 거쳐 판돈녕부사를 지냈다. 저서로 시은일록市隱日錄이 있다.

김상수金庠洙1871(고종8)~1926(일제강점기), 제주향교의 직원直員. 유림의 반수班首. 자는 공서公序, 호는 학암學庵. 본관은 광산, 애월읍 하귀리<귀일>에서 김치경金致慶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9726일 대한제국 학부에서는 그를 제주향교 직원으로 임명했다.

향교의 직원이란 대한제국 시대의 판임관判任官 벼슬이다.

그의 장남 김용하金容河는 광복 후 제4대 제주도지사를 역임했다.

김상수는 대우大宇재벌 김우중金宇中 회장의 조부이다.

김상삼金象三1691(숙종17)~?, 문신. 대정현감. 자 덕보德甫, 본관 경주, 김몽선金夢善의 아들,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1714(숙종40) 문과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했다.

1735(영조11) 11, 김진옥金桭玉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376월에 파직되었다. 김상삼은 그 후 전적을 역임했다.

김상추金商秋1911(일제강점기)~1993, 학생의 항일활동. 남원면 신흥리<보말->에서김동식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복 50여 년 만인 19972월 모교에서는 김상추를 포함한 두 애국자에게 모교의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김상헌金尙憲1570(선조3)~1652(효종3), 상신相臣. 제주 안무어사, 제주 오현五賢의 한 사람.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 또 중년 이후 양주楊州 석실에 은퇴하면서 석실산인石室山人이라고 하고, 또 말년에는 안동에 은거하면서 서간노인西磵老人이라고도 했다.

김상헌은 본관이 안동이며 서울에서 돈녕부 도정都正 김극효金克孝의 아들로 태어나니 우의정 상용尙容의 아우이다. 세 살 때에 큰아버지 현감 김대효金大孝에게 출계했다.

김상헌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1601(선조34)에 제주에서 있었던 소덕유·길운절의 역모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안무어사로 파견되었다. 제주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이어서 한라산신제를 지냈는데 제물을 실었던 배에서 제물이 떠내려 간 것과 한라산에 올라 산신제를 정성스럽게 지냈음을 기록했다.

1622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 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 시비와 숙특淑慝(=善惡)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6(인조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으로 추존하려는 데 반대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 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예조판서로 병조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해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하였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 등 서인계 산림의 등용을 권고했다.

그 후 80년이 지나서 조정에서는 1682(숙종8) 예랑禮郞 안건지安健之를 보내어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사액賜額하고 충암 김정金淨, 규암 송인수宋麟壽, 동계 정온鄭蘊과 함께 청음 김상헌을 제주 사현四賢으로 봉향했다.

13년이나 지나 1695(숙종21) 우암 송시열宋時烈을 추가해 봉향하니 이를 제주의 오현五賢이라고 해서 오늘날까지 도민들로부터 숭앙받고 있다. 그가 지은 김충암묘문金沖庵廟文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시문과 조천록朝天錄·남사록南槎錄·청평록淸平錄·설교집雪窖集·남한기략南漢紀略 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淸陰全集’ 4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청음전집淸陰全集4014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그리고 그의 글 남사록南槎錄은 제주에 관한 글로서 청음전집에 포함되어 있다.

남사록 원본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보존 중이다.

남사록은 16028월부터 이듬해 2, 6개월 동안의 제주 기행문으로 제주의 상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