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도 '범죄와의 전쟁'…집권말 한해 233명 처형하기도
세종대왕도 '범죄와의 전쟁'…집권말 한해 233명 처형하기도
  • 제주일보
  • 승인 201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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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범에 온정 베풀다가 말년에 '엄벌주의' 선회
형사정책硏 논문…"온정주의, 치안에 오히려 걸림돌"
세종대왕상
세종대왕상

조선 시대 성군의 상징인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이 집권 말기에는 죄인들을 해마다 100명 넘게 사형에 처하며 '범죄와의 전쟁'을 벌였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30일 조병인 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학술지 '형사정책연구' 여름호에 실은 논문 '세종시대 도둑과의 전쟁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세종은 재위 29(1447)부터 31년까지 3년간 모두 550명의 죄수를 처형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재위 30(1448)에는 무려 233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세종이 임금으로 일한 316개월간 처형당한 범죄자가 모두 1491명이고, 즉위 이후 28년간 처형 인원이 해마다 50명 안팎에 머문 점을 감안하면 말년에 극형이 유난히 집중된 셈이다. 사형수 대부분은 강도·절도 등 도둑이었다.

논문에 따르면 어진 정치를 다짐하며 즉위한 세종은 재위 기간 형정담당 관원들에게 형벌권 발동을 최대한 자제하도록 당부했고, 형 집행을 정지하는 '금형일'(禁刑日)을 지정하는 방식으로 사형 집행을 지연시켰다.

부정을 타 농사를 망칠 수 있다는 이유로 집행을 가을로 미루게 하는가 하면 일식과 월식이 있는 날, 초하루, 보름날, 24절기, 비 오는 날 등 여러 이유를 집행 연기 사유로 붙였다. 이 때문에 재위 21년에는 미결 사형수가 190명까지 늘어났다. 조 전 위원은 "세종은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아 병석에서 보낸 날이 많았으니, 처형 재가를 올릴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짚었다.

세종은 즉위 초반 온정주의적 형사정책과 함께 사면도 자주 내렸다. 세종실록 기사를 보면 세종은 즉위 4'절도 3범을 가려서 처형할 때 사면 이전의 범행은 묻지 말도록 했다'고 돼 있다. 종전에는 사면 이전 범행을 합해 절도죄로 세 차례 적발되면 교수형에 처하는 게 원칙이었다. 세종은 도둑 대책을 '중벌(重罰)주의'에서 '온정주의'로 바꾼 이후 23년간 20차례 사면을 베풀었다.'

온정주의 형사정책은 치안이 불안해지는 역효과를 냈다고 논문은 지적했다. 횃불을 들고 다니며 재물을 약탈하는 화적(火賊)이 출몰해 신도시 한양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는 것이다. 화적떼 단속이 국정과제로 떠오르면서 재위 8년에는 오늘날 소방청에 해당하는 금화도감(禁火都監)이 출범했다. 이후 신하들과 장기간 논쟁 끝에 중벌주의를 복구했고 재위 말년에 대대적 사형 집행이 이뤄졌다고 논문은 분석했다.

세종은 재위 27년에 이르러서야 형조판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벌주의 정책을 23년 만에 복구했다. 2년 뒤부터는 소나 말을 훔치다가 적발되면 곤장 100대를 때리고 팔에 '소도둑'(盜牛·도우) 등 문신을 새긴 뒤 가족과 함께 섬에 격리했다. 두 번째부터는 곧바로 교수형에 처하기로 했다. 한 번에 십수 명씩 처형당한 끝에 이듬해 기록적인 처형이 이뤄졌다.

재위 말기 죄수들이 무더기로 처형된 '잔혹사'는 도둑들을 자비로 다루다가 중벌로 회귀한 결과라고 조 전 위원은 분석했다. "이전 같았으면 진즉에 처형됐을 도둑들이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하다가 중벌이 복구되자 우선 붙잡혀 처형됐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조 전 위원은 "사법기관 전체가 아무리 신속히 변해도 사활을 걸고서 지능적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완벽하게 압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세종의 형사정책은 도둑들에게는 크게 환영받았을는지 몰라도 나라의 치안 수준을 높이는 데는 도리어 걸림돌이 되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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