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제3의 전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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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수, 리쓰메이칸대학 국제관계학부 특임교수/논설위원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가운데 부친을 77세로 잃은 어떤 르포라이터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의 아버지는 ‘고도성장기를 회사원으로서 부지런히’ 살면서 ‘사려(思慮) 깊고’ 균형 감각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만년에는 ‘암과 헤이트(혐오) 사상의 맹독’에 앓고 지냈다고 한다(Daily Shincho·7월 25일).

이처럼 최근 일본에서는 고령자의 우경화나 ‘혐한(嫌韓)’ 증상에 관한 보도가 적지 않다. 일본 내각부가 지난해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에 친근감을 느낀다’는 회답이 18∼29세에서는 57.4%인 데 반해 70세 이상에서는 28.1%에 불과했다.

현재 일본의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30% 가까이에 달하고 있다. 그 중심이 되는 소위 ‘단카이(塊) 세대’(패전 후 1949년까지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는 ‘전후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인격을 형성하고 일본의 고도성장을 떠받쳐 온 집단이다. 일본인의 세계관이나 역사 인식의 주류를 이룰 만한 이 세대가 이제 ‘닛폰카이기(日本會議)’나 아베 정권의 역사수정주의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우경화 일로의 일본이 포스트 촛불혁명 시대의 한국과 대치하는 현재 상황은 한일관계가 역사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1990년대 이후의 식민지배의 ‘도의적 책임론’을 바탕으로 하는 한일관계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 일본은 1993년 고노 담화나 1995년 무라야마 담화, 그리고 1998년 김대중·오부치의 한일파트너십선언 등을 통해 식민지지배의 도의적 책임을 거듭 확인했다. 1965년 한일조약이 전후 한일관계의 첫 번째 전환점을 이뤘다면 일본이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게 된 1990년대는 전후 한일관계 제2의 전기라 할 수 있다. 그 이후로는 투 트랙, 쓰리 트랙으로 불리는 한일관계의 다원화가 진전되고 역사 갈등이 경제나 문화 관계를 크게는 해치지 않는 구조가 정착됐다.

역사를 둘러싼 갈등이 심해졌을 때도 일본의 한국통 관료·정치인과 한국의 지일(知日)파 관료·정치인 간의 물밑 협상을 통해 한일 갈등을 그럭저럭 ‘관리’해 왔다. 2015년 12월의 위안부 문제 합의는 바로 그런 사례였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관리가 기능을 하지 못 할 지경에 와 있다. 1990년대의 도의적 책임론은 한편에서 이에 위기감을 느껴 반발하는 역사수정주의의 대두를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중노년층의 주류는 일단은 식민지지배의 도의적 책임론을 수용했으나 소위 ‘상실된 20년’을 거쳐 점차 내향적으로 변해 가면서 우파나 혐한의 언설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세대들은 워낙 한국을 자국보다도 뒤지는 나라로 보고 왔고 선진국 수준까지 성장한 한국을 건방지고 불쾌한 이웃 나라로 보게 된다. 이렇듯 지금의 일본은 도의적 책임조차 인정하지 않는 역사수정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가 돼 버린 것이다.

한편 촛불혁명 이후의 한국 사회는 공정과 정의를 위한 열망이 넘치는 사회이며, 과거사를 둘러싼 인식도 도의적 책임을 넘어 일본의 법적 책임을 분명히 묻는 수위에까지 달하고 있다.

즉 1990년대 이후의 도의적 책임론을 바탕으로 하는 한일관계 체제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거절돼 한일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 제3의 전기를 거친 한일관계가 어떤 모습을 드러낼지는 한국 국민의 의지와 각오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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