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 시대 ‘묵은 성’ 있던 마을…역사 냄새 솔솔
탐라국 시대 ‘묵은 성’ 있던 마을…역사 냄새 솔솔
  • 제주신보
  • 승인 201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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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근성 과거 여관·요정·상가 등 발달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촌 형성된 곳
풍운뇌우단·사직단 등서 제사 지내
자연의 신들에게 곡식의 풍요 빌어
무근성은 옛 탐라국 시절 성담을 쌓았던 묵은 성이 있던 마을이다. 과거에 여관, 요정, 상가가 발달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마을 유지 강만호가 피난민들에게 자신의 토지를 내줘 형성된 피난민촌이 있었다. 사진은 1970년대 무근성 마을안길을 복구하기 위해 주민들이 발벗고 나서고 있는 모습. 사진=제주시 제공
무근성은 옛 탐라국 시절 성담을 쌓았던 묵은 성이 있던 마을이다. 과거에 여관, 요정, 상가가 발달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마을 유지 강만호가 피난민들에게 자신의 토지를 내줘 형성된 피난민촌이 있었다. 사진은 1970년대 무근성 마을안길을 복구하기 위해 주민들이 발벗고 나서고 있는 모습. 사진=제주시 제공

이번 길은 무근성 마을 안길에서부터 풍운뇌우단 터까지의 유적을 소개해 본다.

무근성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주성 서북에 고성유지가 있다.(州城西北 有古城遺址)’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이 성은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 초로 이어졌던 주성 이전의 고성을 의미한다.

지금까지도 지명으로 불리고 있는 무근성(묵은성)이 바로 이 고성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당시의 고성은 조선시대 초의 주성보다는 규모가 작았으리라 추정된다.

여러 기록에서 보면 탐라국 시대 고성은 북으로는 해안을 끼고, 동성은 산지천 서안을, 서성은 병문천 동안을 각각 경계로 삼아 축성됐다고 한다.

16세기 말 동성(東城)이 세워지기 훨씬 오래전부터 주성인 제주성지는 산지천을 자연해자로 해 구축돼 있었다.

 

무근성임을 알리는 표지석의 모습.
무근성임을 알리는 표지석의 모습.
풍운뇌우단 터를 알리는 표지석.
풍운뇌우단 터를 알리는 표지석.

무근성 초입에 들어서면 무근성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마을 곳곳에도 표지석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무근성은 옛 탐라국 시절 성담을 쌓았던 묵은 성이 있던 마을로 제주목 관아의 서쪽 울타리를 끼고 돌면 과거 여관, 요정 및 상가가 발달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마을 유지 강만호가 피난민들에게 자신의 토지를 내주어 형성된 피난민촌이 있었다.

그리고 아침밥을 짓기 위해 아낙네들이 병문천 배고픈 다리를 건너 선반(仙盤)물이란 용천수를 길어오던 애환을 담은 이야기가 있다.

탐라지(耽羅志)에서는 병문천(屛門川)은 서성(西成) 밖에 있다. 그 하류는 벌랑포(伐浪浦 : 부러릿개)가 된다고 했다.

이 병문천은 제주시 아라1동과 도남동의 서쪽을 지나고 옛 제주 읍성 서쪽 성 밑을 돌아 제주시 이도2, 삼도1동과 용담1동 경계를 이루면서 북쪽으로 흐르다 바다에 이른다.

1914년경에 교량이 건설된 후 여러 차례 중수되다가 1995년 복개공사가 이뤄졌다.

 

무근성~풍운뇌우단 터 여정 지도(빨간색 선).
무근성~풍운뇌우단 터 여정 지도(빨간색 선).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는 섬사람들에게는 늘 두려움과 호기심이 교차하는 대상이다.

섬나라인 탐라는 오래전부터 바람이 많은 바다를 오가며 주변의 나라들과 교역을 해왔다.

또한 동시에 탐라선인들은 바다를 관장하는 정령들께 항해를 무사히 할 수 있도록 지극정성으로 경배를 올리는 숭배사상을 지녀오고 있다.

무근성을 돌아 나오는 길가에 한 표지석이 있다. 이 곳은 풍신(風神운신(雲神뇌신(雷神우신(雨神)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었던 터이다.

바로 주성(州城) 서북쪽인 사직단 옆에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바다의 자연재해를 내리는 바람과 구름, 천둥번개와 비를 내리는 자연의 신들에게 제를 지냈던 터이다.

선조들은 풍운뇌우단을 쌓고 하나의 신좌로 해 봉안했는데, 국가의 제2등급 제사인 중사(中祀)에 해당한다.

풍운뇌우제는 조선 초기부터 계속 실시돼 왔는데, 이형상 목사의 건의로 일시적으로 중지됐다가 복설됐다.

그런데 당시 이형상 목사가 건의한 내용을 살펴보면, 풍운뇌우단은 중앙 조정에서만 제사를 지낼 뿐 다른 지방에서는 제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유독 제주도에서는 제사를 지내왔으며, 그것도 ()을 설치한 초기부터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이 있어서 본주에서 치제(致祭)하였다는 기록에서 보이듯이, 이미 조선시대 이전인 탐라국 시대부터 계속됐을 뿐만 아니라 고려 숙종 때 군현제에 편입되면서도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에 세운 표지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풍운뇌우제를 지내던 제단터이다. 풍운뇌우단은 처음 주성 남쪽 3리 사직단 북쪽에 있었으며 1702(숙종 28) 목사 이형상이 헐었으나, 1719(숙종 45)목사 정석빈이 주민의 소청을 들어 이 자리에 옮겨 세웠다.

이곳에서는 음력 2월과 8월 바람 구름 우레 비의 신에게 무사태평을 비는 제사를 봉행했다.”

삼천서당을 창건한 김정 목사(1735-1737)가 풍운뇌우단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다음은 풍운뇌우제단 근처에 있었던 사직단(社稷壇)에 대한 설명이다.

제주 고을의 사직단 터로 처음에는 남문 밖에 있었으나, 1719(숙종45) 정석빈(鄭碩賓) 목사가 묵은성 서쪽의 사작이안으로 옮겼다.

사직단은 종묘(宗廟)와 함께 나라의 신과 곡식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사직단은 왕이 있는 한성부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라 각 지방마다 설치해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었다.

그 이유는 사(사신(社神)이 토지의 신(), 그리고 직()이 곡식의 신을 가리키며, 사직에 대한 제사는 곧 농업 국가로서 국가 경제의 기초를 지켜주는 신에 대한 제사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제사는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물론 지방 주현 수준에서도 함께 시행하도록 돼 있었다.

탐라순력도에서는 여단( )의 위치가 제주성 바로 서쪽 바닷가로 표시하고 있다. 지금의 풍운뇌우단 근처로 여겨진다.

여제( )란 돌아가 쉴 곳이 없는 귀신인 여귀를 달래는 제사이다.

성황신이 여귀를 불러 모으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난 사흘 후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받지 못하는 여귀( )에 제사지내는 제단이다.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해 주인이 없는 외로운 혼령을 국가에서 제사지내 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