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관광의 오래된 생각, 지역사회 기반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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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초빙교수/논설위원

내 고향 대포(大浦)는 포구가 커서 큰갯물이라 불린다. 일제시대에는 포구 앞에 일본 연락선이 정박해 중문 일대의 일본행 승객들을 실어 날랐다. 또한 마을을 둘러싼 해안이 길고 절경이 많아 일찍부터 관광지에 편입되었다. 컨벤션센터(ICCJEJU)가 생기면서 유명해진 주상절리가, 실은 대포마을의 경계 안에 있다. 우리는 그곳을 ‘지삿개’라 불렀다.

지삿개 바다는 수심이 깊어서 상군 해녀들만 물질하는 곳이다. 물이 깊은 만큼 주상절리의 기둥도 높다. 석공이 암벽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마치 돌기둥 병풍을 둘러쳐 놓은 듯한 형상을, 어느 시인은 ‘신들의 궁전’이라 불렀다. ‘제주 바다는 소리쳐 울 때 아름답다’는 시 또한 이곳을 일컫는다. 대포마을회가 편찬한 ‘큰갯마을’에는 이러한 상황을 뒷받침해주는 일화가 있다. ‘태풍이 불어서 집채만 한 파도들이 소리치며 달려오던 날, 마을의 한 농부가 주상절리 바로 위의 밭을 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을 집어탄 물벼락이 거세게 달려들어 온몸을 홀딱 적시고 말았다. 밭을 갈던 소도 얼마나 놀랐던지 쟁기를 이끈 채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고.

사실 중문 관광단지로 수용되기 전, 이곳은 대포마을의 문전옥답이었다. 관개수로를 통해 천제연의 물을 농업용수로 공급받아 ‘너배기(넓은밭)’가 만들어졌다. 자갈밭을 논으로 개간하면서 쌓아 올린 거대한 밭담(작박)은 모내기하는 사람들에게 낭만 식탁이 되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들어, 중앙정부가 이곳을 중문관광단지로 개발했다. 피 땀 어린 농토들이 관광지로 변경됐다. 중학교 사회시간에 선생님은 ‘생명 같은 농토를 팔고나면 농사 대신 호텔 잔디밭에서 풀을 뽑아야 한다’며 생존권 수호를 강조했다. 마을 사람들은 머리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내 땅 지키기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땅들은 특별히 만들어진 법에 따라 강제로 매각됐다. 특히 천제연 하구에 여남은 가구가 모여서 이뤄진 배린내(별이 내리는 냇가)는 마을이 통째로 수용됐다. 아름다운 게 마을에게도 죄가 되었다. 주인을 잃은 초가들은 호텔로 변신해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 사이, 아들한테 간다며 배린내를 떠난 제이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얼마나 고향집이 그리웠으면 그리도 빨리 넋이 되어 돌아왔을까. 대포 마을도 상당수 주민들이 땅값을 쥐고 마을을 떠났다. 그 돈은 제주시나 서귀포로 나가서 아파트를 사자마자 거덜이 났다. 일찌감치 돈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아이들도 마을을 떠났다. 집을 나간 자식들은 부모와 함께 농사할 땅이 없으므로 인해 영원히 귀향하지 못했다. 게다가 사는 형편이 비슷하던 사람들 간에 빈부의 격차가 발생했다. 포구 주변에서 횟집을 하거나 운 좋게 관광업을 시작한 이들이 큰돈을 벌었다. 관광단지로 유입된 사람들은 마을 안에다 빌라나 주택을 지었다. 마을의 정서와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마을이 원하지도 않는데 어느새 관광지가 되었다.

중문관광단지가 개발된 지 어언 40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역사회 내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 있는 것은 ‘관광정책의 주체는 지역주민임’을 방증하는 현상이다. 마침 이곳에서 열린 올해의 섬관광정책포럼이 지역사회 기반 관광(Community-based Tourism)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 오래된 생각이 발리, 오키나와, 페낭, 푸켓 등과도 마을관광으로 공유됐다. 이제는 지역주민이 관광을 이끌어 가는 ‘지역사회 기반의 관광정책’이 제주의 234개 마을마다 정착돼야 할 때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곳으로서의 제주도가 지역주민들에게도 같은 온도로 공감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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