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단파 방송 ‘미국의 소리’ 통해 독립 의지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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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호①, 대정현감
김상호②, 서울대 명예교수…韓지리교육학회 조직
김상환, 정의현감·찰방 등 지내
김상훈, 일본 나가사키 학생 항일 활동
김상흡, 제주피난교 교장 등 역임해
김상희, 소련 망명 기도해 징역형
1952년 5월 20일 개원한 초대 제주도의회가 제1차 의원 소집을 기념하는 모습. 당시 제주도의원은 전인홍, 송방식, 허만필, 김영진, 김찬익, 현경만, 김선희, 차명택, 강성건, 김도준, 강재량, 김잉희, 고인도, 김대원, 장용직, 김상흡이었다. 김상흡은 제주로 피난 온 학생들을 모아 오현단 앞에 제주피난중·고등학교를 개교하며 피난민들의 표심을 확보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52년 5월 20일 개원한 초대 제주도의회가 제1차 의원 소집을 기념하는 모습. 당시 제주도의원은 전인홍, 송방식, 허만필, 김영진, 김찬익, 현경만, 김선희, 차명택, 강성건, 김도준, 강재량, 김잉희, 고인도, 김대원, 장용직, 김상흡이었다. 김상흡은 제주로 피난 온 학생들을 모아 오현단 앞에 제주피난중·고등학교를 개교하며 피난민들의 표심을 확보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상호金商澔①:대정현감. 1890(고종27) 3, 김석진金錫振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동년 8월에 떠났다.

18906월 김상호가 대정현감으로 도임 당시 일본 어선이 불법으로 관내에 하륙해 재물을 약탈하고 주민을 살해하니 송구호宋龜浩 목사가 이를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전년도에 체결된 한·일통어장정韓日通漁章程의 시행을 1년 간 연기토록 일본공사에게 요청했다.

일본공사는 결국 훈령訓令으로 1891424일까지 연기한다고 회시해 왔다.

김상호金相昊②:1918(일제강점기)~ ?, 지리학자, 서울대학교 교수. 호는 현석玄石, 본관은 김해, 중문면에서 전 제주도의원 김옥현金玉賢의 아들로 태어나 유년 시절은 제주 시내에서 지냈다.

그럴 것이 부친이 일제하의 경찰관으로 10여 년을 거치면서 제주성 안에 살았으며 광복 후 19525월 남제주군 선거구에서 대한청년단 소속으로 초대 도의원에 당선됐다.

소년 김상호는 제주시 일도리에 살면서 제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40년 경성공립사범학교 5학년을 졸업해 동년 전남 순천順天남국민학교에서 초등교사로 출발, 중등 교사자격 시험에 합격해 1941년 청주사범학교 교육 2년을 하고 조국이 광복되었다.

1947년 서울의 경동京東중학교 교사를 거쳐 1949년 문교부 편수관으로 건국 초기의 새로운 교과서 편찬에 참여했다.

그는 1954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수로 임명된 후 정년될 때까지 30년을 일관되게 재임했다.

전공은 자연지리학인데 그 중에서도 지형학地形學 연구에 몰두한 후 1957년 논문 한강 하류의 침식면의 지형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한지리학회 부회장을 거쳐 1970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한국지리교육학회를 조직, 초대 회장으로 활동했다.

1975~1984년 서울대 사회과학대 교수, 1982년 지리교육학회 명예회장, 1984 서울대 사회과학대 명예교수를 지냈고 주요저서로 지리학개론’, ‘한반도의 지형 형성등이 있다.

1983년 정년퇴임, 대학에서는 주로 지형학을 중심으로 자연지리학 분야의 강의를 맡는 한편 역사지리학·문화지리학·지리학 방법론·지리교육 분야에서도 연구업적을 남겼다.

중등학교 지리 교과서와 지리부도의 저자로도 이름이 알려졌다.

김상환金商煥1699(숙종25)~?, 문신. 정의현감. 경기도 통진通津에서 태어났다. 자는 후경厚卿, 본관은 김해, 김언하金彦夏의 아들이다.

1735(영조11) 문과 정시에서 을과로 급제, 벼슬은 찰방에 이르렀다.

그는 1740(영조16) 8, 나억령羅億齡의 후임으로 정의현감에 도임하고 174212월에 떠났다.

김상훈金相勳1923(일제시대)~?(분단시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학생의 항일 활동. 본관은 김해, 구좌읍 월정리<무주->에서 김윤지金允止3남으로 태어났다. 항일 독립운동가 김응빈金應彬의 아우이다.

김상훈은 일본 나가사키현 현립 간조諫早농학교에 유학, 학우 고운하高雲河(21·성산포)와 함께 19404월 중순경 신입생 환영 축하회에 초청 받았다.

이때 상급생들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라는 얘기에 공감하고 있던 차에, 일본 학생들로부터 수모를 받자 더욱 항일감정이 노출되었다. 19416월경 중·일전쟁에 관한 유언비어를 유포시켰다고 경남 출신 8, 충남 출신 2, 함남 출신 1명과 함께 구속되었다.

김상훈과 고운하는 19435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6월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조국이 해방되고 미군정 하에서 1947223일 제주도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되었다.

의장단에 안세훈安世勳, 이일선李一鮮, 현경호玄景昊 등이 선출되고 부의장단에 김상훈을 위시해 김택수金澤銖, 김용해金容海, 오창흔吳昶昕 4명이 선출됐다.

오현단 앞 제주피란중·고등학교의 발상지.
오현단 앞 제주피란중·고등학교의 발상지.

김상흡金相洽1905(광무9)~?, 초대 제주도의원, 황해도 재령 태생, 일제강점기에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제헌의원制憲議員4·19 후 민선民選 초대 서울시장을 지낸 김상돈金相敦의 아우, 서울에서 19511·4후퇴를 만나 제주도로 피난을 와서 제주-성안삼도리에 정착했다. 육지부 각지에서 피난을 온 중등학생들을 모아 오현단 앞에 제주피난중·고등학교를 개교해 교장에 취임, 이로서 피난민避難民 표를 얻어 19525·10선거에서 초대 제주도의원에 당선됐다.

1954219일 점차 시국이 안전하니 서울로 주거지를 옮겨, 이에 따라 제주도의원도 사임해 상경했다.

한편 제주피난교濟州避難校 교장직校長職은 오현고 교장 이경수李慶守가 겸직했다.

한편 1952년 초대 제주도의원 5·10선거는 정원 20명에 56명이 입후보했다. 북제주군선거구에서 36명이 출마 13명이 당선, 남제주선거구에서는 20명이 출마해 7명이 당선되었다.

김상희金商熙1923(일제강점기)~?, 제주무선통신소의 단파 방송 미국의 소리청취에 따른 항일 활동. 제주읍 이도리<제주-성안> 태생이며 제주시 외도리<-도그내>에서 살았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은 1944년에 이르러 패색이 짙어가고 해외 동포의 항일운동도 격렬해졌다.

동년 단파短波를 통해 조국의 동포에게 격려하는 미국의 소리방송이 전달되었다. 194489일 밤 독서회 회원 김상희金商熙(24·이도), 김운제金雲濟(20·일도), 김귀석金貴錫(24·일도) 등은 제북교 북쪽에 위치한 무선통신소에서 우연히 미국의 소리방송을 들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육성 방송이었다. “나는 이승만입네다. 나 이승만은 국내·외에 살고 있는 2300만 동포에게 말합네다. 어디서든지 듣는 이는 자세히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하려는 것은 제일 중요하고 제일 기쁜 소리입네다. 자세히 들으시어 다른 동포에게 일일이 전하시오.”라는 독특한 말투였다.

이를 듣고 함북으로 건너가 두만강을 넘어 소련 땅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기로 해 김운제와 김귀석은 장도에 올랐다.

김상희, 고영수 등 12명이 청주로 압송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았고, 망명을 기도한 관계로 1945517일 청진지방법원에 의해 소위 치안유지법·육해군 형법·조선 임시보안령 위반으로 김운제, 김귀석은 각각 징역 3년을, 김상희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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