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린, 우도민 세금 고충 해결 앞장
김서구, 제주판관…효자·열녀 정려
김서호, 노동 야학 항일 운동 펼쳐
김석민, 숙종 때 제주판관
소설가 김석범, 제1회 제주4·3평화상 수상
▲김상희金詳熙:1930(일제강점기)~?, 서울시경찰국장, 김해김씨 삼현三賢공파 복福공계, 애월읍 애월리<애월포> 김병택金秉宅의 아들, 육군중령으로 轉役, 제대 후에 경찰에 투신 1962년 6월부터 제주도경찰국 수사과장을 5개월 동안 근무했다.
앞서 목포사범 졸업, 6·25에 참전한 국가유공자, 육군장교로 도미渡美 유학, 1954년 보병학교 M1소총 사격술 교관敎官, 서울시경 정보과장, 남대문경찰서장, 인천경찰서장, 영등포경찰서장, 뒤에 전북, 충남, 경북경찰국장을 거쳐 서울시경찰국장을 지냈다.
※필자의 변 : 나는 1954년 대학도大學徒 특별군사훈련 전반기前半期 교육을 받았는데 마침 M1소총 사격술 교관이 김상희 중위였다. 김중위는 1944년 애월교 19회로 졸업한 학력이 매우 우수한 나의 3년 선배였으니 광주시 상무대尙武臺에서 교육을 받을 때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김석린金錫麟:1806(순조6)~?, 선비. 우도牛島의 개척자이고 훈학자. 자는 공서公瑞. 김재온金裁溫의 아들, 본관은 경주, 제주성 안에서 태어났다.
문인 난곡蘭谷 김양수金亮洙의 부친이며 제주시 동광양 태생이라고도 한다.
1828년(순조28) 생원 시험에 합격, 진사가 되고 조정에서 1842년(헌종8)에 우도의 기경起耕 허가를 내리자 1844년 김진사는 신씨 부인과 함께 소섬으로 들어가 새로운 개척자가 되고 입경자入耕者들의 훈학에 종사했다.
그는 또 유력한 지식인으로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이원조李源祚 제주목사는 입경 허가를 내리자 유이민流移民들로 하여금 농산물과 해산물에서 얻은 수익금의 일부를 세금으로 사복시司僕寺에 납부하도록 하자 김진사는 당시의 세폐稅弊와 관폐官弊에서 오는 어려움을 우도민의 편에 서서 잘 해결했다.
김진사가 죽은 후 우도에 들어온 유이민들은 김진사의 공적을 기리어 우도 입경 허가 60주년 즉 회갑이 되는 1902년(광무6) 4월에 ‘진사김공석린 유애비遺愛碑’를 소섬 중앙에 건립했다.
흔히 고인의 인애仁愛와 유풍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을 유애비라고 하며 매년 실시하는 소섬의 마을제를 이곳에서 거행할 때 그를 기리고 있다.
▲김서구金瑞龜:1683(숙종9)~?, 문신. 제주판관. 경상도 안동安東에서 출생하고 자는 국서國瑞이다. 본관은 안동, 김전金專의 아들이다.
1721년(경종1) 문과 식년시式年試에서 병과로 급제, 벼슬은 첨지에 이르렀다.
1744년(영조 20) 8월, 김명려金命礪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46년 5월 상관을 순영巡營에 월소越訴한 일로 제주감진어사監賑御史가 입도하기 이전에 파직되자 나거拿去되었다.
특히 목자고牧子庫를 설치, 공마를 관리하고 또 행정을 공정하게 하고 효자·열녀를 찾아 정려했다.
또 후임 목사 윤식尹植이 1745년 9월 떠났는데 ‘탐라속지耽羅續誌’와 ‘효열편孝烈篇’을 저술했다.
▲김서호金瑞鎬:1907(융희1)~?(분단시대), 조천 노동 야학 및 일본 오사카에서 공산당의 항일 활동, 본관은 김해, 조천읍 조천리<梨洞>에서 김응현金應鉉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29년 8월 13일 제주청년동맹 조천지부의 정기총회 때 부녀자에게 노동 야학으로, 문맹자에게 기초교육을 실시하했다.
이 일은 청맹원靑盟員 김순탁金淳鐸, 김시추金時秋, 김서호 등이 담당했다.
1930년 2월 일경은 이들 조천 신좌문고新左文庫 및 청맹원들을 검거해 야학으로 항일 운동을 의식화했다고 재판에 회부했다.
그는 1930년 4월 24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4년을 선고 받았다.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1933년 6월말 현재의 오사카 거주 한인수는 13만3000여 명으로서 도쿄의 3만8000여 명에 비하면 3.5배나 더 많다.
일본 공산당의 한인 당원 공작이 오사카에 치중된 것은 이 도시에 한인의 가장 많이 거주한다는 사실과 특히 노동 인구가 많다는 점에 있었다.
▲김석민金錫民:제주판관. 1703년(숙종29) 12월, 이태현李泰顯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06년 4월에 떠났다.
1703년 12월 조정에서는 분정곡分定穀 8000섬을 통수영統水營의 배로 수송하여 진휼, 이는 큰 기근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석범金石範:1925년(일제강점기)~?, 재일교포 소설가. 본명은 신양근愼陽根, 제주시 삼양동<설-개>에서 태어났다.
제주4·3사건을 다룬 이 작품으로 1984년 오사라지로오상<大佛次郞賞>과 제39회 마이니치<每日> 예술상을 수상했다.
앞서 1938년 츠루하시<鶴橋> 심상소학교 졸업, 해방 직전에는 제주시 삼양리에서 살다가 일군日軍 징병검사를 받아 1946년 초에 도일渡日, 일본 교토대학 미학과 졸업.
재일본 조선학교 교사, 오래 사이다마켕<琦玉縣>에서 살았다. 조선일보 기자, 문학예술지 편집장, ‘삼천리지’ 편집위원 등을 지냈다.
1984년 아사히<朝日>신문상 수상, 제주4·3평화재단은 김석범을 제1회 제주4·3평화상 수상자로 결정, 상패賞牌와 상금 5만 달러를 2015년 4월 시상을 했다.
한편 수상자는 일본에서 1957년 소설 ‘까마귀의 죽음’과 ‘바다 속에서 땅 속에서’ 등을 출간 후 조총련朝總聯을 떠났다.
1970년에 쓴 ‘만덕유령기담萬德幽靈琦譚’을 발표해 작가로서 지위를 확고히 했다. 1976년부터 20여 년 간 일본 문예춘추文藝春秋사 문학계에 4·3대하소설 ‘화산도’를 연재, 20여 년만인 1997년 제7판을 발간해 주목을 받았고, 4·3의 진실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또 1987년에는 도쿄<東京>와 오사카<大阪>에서 제주4·3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 제주공항 터에서 4·3유해遺骸발굴이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외로 일본의 과거사過去史 청산 등에 대한 의견을 일본日本 주요 일간지에 게재해 교포사회에서 평화·인권·생명 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