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영향으로 동굴 무대서 실내로···바람난장 등 객석은 만원
거세진 빗줄기, 흐르는 빗물 위로 우리의 전통가락이 흐른다
불면의 밤, 당신의 시와 춤은 따듯한 자장가다
불면(不眠)의 밤을 아는가. 눈을 붙여도 잠이 오지 않는, 자꾸만 뒤척이는 그런 밤. 집요하게 비집고 들어오는 잡념에 허우적거리는, 비자발적인 불면증. 가끔 상상을 한다. 깊은 잠은 어떤 맛일까. 현실과 완벽히 차단된 꿈속을 다녀오는 기분은 어떤 느낌일까. 내일도 글피도 불면의 밤이겠지. 밤새 날 것의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겨우 마주한 새벽은 너덜너덜, 창백하다. 마치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동굴을 다녀온 기분이랄까. ‘동굴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 ‘발을 뻗으면 어둠의 뒤편, 허공에 새겨 넣은 그림자가 만져진다 (김효선 ‘동굴의 역사’ 중에서)’처럼.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남게 되는, 온 몸에 동굴의 무늬를 새기는 뜨거운 고통의 시간이다.
그러나 동굴이라는 물리적 공간. 지하에 비밀스럽게 숨어있는 공간이다. 암흑과 침묵의 세계다. 시간을 거슬러 들어가보면 억겁의 시간이 벽을 타고 흐르며 뻗어나간, 감히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시·공간을 초월하며 이룩한 세계를 만난다. 누군가에겐 칠흑 같은 어둠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내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빠져나오기 힘든 검고 긴 터널 같은 동굴의 삶이 여기 있다.‘산비탈 동굴에서/한 석 달 꿈도 없는 겨울잠’을 자야만 하는 이들,‘서울역 깊은 동굴 거대한 방 한 귀퉁이/신문지에 둘둘 말린 잠’을 청해야 하는 이들. 길 위의 노숙(露宿)은 얼마나 처절하고 처연한 잠인가. 연극인 강상훈 님의 낭송이다. 담담하다 못해 사실적인 목소리. 노숙의 현실이 치밀하게 살아난다.
시낭송으로 문을 연 바람난장. 오늘의 무대는 협재에 자리 잡은 돌빛나예술학교 강당이다. 당초 우리동네관악제 참여 연주자들과 함께 돌빛나예술학교의 동굴 무대에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태풍의 영향으로 실내로 옮겨졌다. 모처럼 큰 비였다. 그럼에도 객석은 만원이다. 국제관악제 스텝과 연주자들, 바람난장과 관객들까지 총 100명을 훌쩍 넘는 인원이 강당 안에 모였다. 덥고 습하고 먼 길 오느라 지쳤을 터. 그러나 피로감을 잊게 만드는 청량한 목소리. 사회자로 나선 연극인 정민자 님이다. 해마다 국제관악제로 들썩이는 제주의 여름을 소개하며, 관악제 연주팀들과 함께 바람난장 무대를 장식하게 된 소감을 전했다.
빗줄기가 거세진다. 바람이 불고 흐르는 빗물 위로 우리의 전통가락이 흐른다. 진도북춤을 들고 나온 무용가 장은 님이다. 보름달 아래서 춤을 추며 무더위를 달랬을 선조들의 모습이 아마 이러하지 않았을까. 한 여름의 풍류가 시가 되고 가락이 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춤은 한 시절이 되어 우리를 시간 저편으로 실어 나른다.
토닥토닥 어릴 적 나를 잠들게 하던 따사로운 목소리를 기억한다. 어른이 돼서 다시 듣고 싶은 자장가는 노래가 아니어도, 가락이 아니어도 좋다. 나를 편하게 잠재울 수 있는 따뜻한 한 편의 이야기면 된다. 세상의 모든 불면의 밤을 덮어줄 그 행복한 이야기가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