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형은 의병 참모, 아우는 저서 활동으로 ‘민족혼 일깨워’
(100)형은 의병 참모, 아우는 저서 활동으로 ‘민족혼 일깨워’
  • 박형준 기자
  • 승인 201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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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윤, 제주 의병 항일항쟁 주도해
김석익, 향토사학자…탐라기년 편찬
김석영, 광복 후 초대 제주소방서장
김석종, 서당 훈장…한문 서당 개설
김석진, 고종 때 대정현감으로 도임
1977년 제주시 사라봉 공원 모충사에 건립된 ‘의병항쟁기념탑’의 모습. 이 탑은 1909년 제주 항일 의병들의 의로운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977년 제주시 사라봉 공원 모충사에 건립된 ‘의병항쟁기념탑’의 모습. 이 탑은 1909년 제주 항일 의병들의 의로운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김석윤金錫允1877(고종14)~1949(분단시대), 한말 제주의 의병활동. 의병 참모장. 종교인. 기병起兵 격문작성자. 본관은 광산, 김창규金昌圭의 아들로 산북 이도리<제주-성안> 138번지에서 태어났다.

원적은 산북 오라동<오라위>이다. 처음 이름은 석명錫命, 자는 근수謹受, 호는 석성石惺이다.

자라면서 박춘경朴春卿, 장기찬張基璨에게 기초 한문을 배우고 1887년 운감雲龕 김병규金炳奎의 광양서재에서 통감, 사서, 사략 등 학문을 익혔으며 또 김설월金雪月 문하에서 금강반야경을 수학했다.

1893년 전남 해남군 대흥사에서 스님 주운담朱雲潭의 문하에서 1년 동안 불법을 익히고 전북 완주군 위봉사에서 5년간을 수도하였다. 법명은 종화鍾華, 법호는 상운祥雲이라고 했다.

1908년 호남의 장성에서 거의擧義한 의병장 기우만奇宇萬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면서 동지를 규합해 제주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민병을 모아 의병장에 고사훈高仕訓, 이중심李中心 양인을 추대하고 김석윤은 의병 참모로 소임을 맡았다.

김석윤은 의병 활동 중 일경에 체포되고 190942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유배 10년이란 유형流刑이 선고되자 항소하였다.

이에 1909722일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라는 선고가 내려졌다.

이후 불교에 더욱 정력을 쏟아 안봉려관安蓬廬觀이 색수수塞水藪에 관음사를 창건할 때 불교를 설법하며 많은 재력을 쾌척快擲했다.

또 민족종교인 보천교를 믿게 되었으니 보천교는 동도東道의 화신化身이며 다시 미륵교彌勒敎에 귀의했으니 미륵교는 보천교의 분형分形이다.

김석윤은 18982월 대흥사에서 조운담趙雲潭을 스승으로 내전 초등과를 수료하고 제주 광양서재에서 한문 교사로 취임, 19021월 경남 통영군 용화사에서 이동운李東雲을 스승으로 사교과를 수료하고 또 한문 서재 교사로, 1916년 위봉사에서 비구계를 받고 이어 부산 범어사에서 오회현吳晦玄 스승으로부터 대교과를 수학했다.

19302월 위봉사 말사 청련암의 감원監院에 취임했고 1934년 범어사 제주포교소 월정암, 이어 위봉사 표선면 포교소를 설립, 위봉사 하례포교소 설립, 관음사 평대포교소, 관음사 소림원포교소 등의 감원을 두루 역임했다.

조국이 광복되어 대한불교 제주교구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19465월 구좌읍 김녕리의 백련사의 주지로 만년을 보냈다.

정부에서는 김석윤의 공훈을 기리어 탄신 100주년인 1977년에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석익金錫翼1885(고종22)~1956, 향토사학자. 서예가. 제주시 -과양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석조錫祚, 자는 윤경胤卿, 개자改字하여 윤경允敬이라 하고 후일 홍점鴻漸이라고 하였다.

호는 심재心齋 혹은 일소도인一笑道人, 혹은 해상실사海上佚史라고도 하였다.

본관은 광산, 제주시 이도동<제주-성안> 동광양<과양>에서 김창규金昌圭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016세 때 아석我石 이용호李容鎬에게 한문을 배웠다. 성인이 되고는 전남 광주 서석동에 사는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이 무렵 의병장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한천정사寒泉精舍로 찾아가 인사를 올렸으며 소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이미 기울어지자 이듬 해 송사松沙의 구국 격문을 몰래 가지고 귀향, 이 때부터 민족혼을 진작할 계책을 찾아 먼저 탐라기년耽羅紀年저술에 몰두해 1915년 완성했다.

제주도를 연구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필독서로서 이미 정평을 받은 명저이다. 938(고려 태조 21)부터 1906(광무 10)까지 탐라의 역사적인 자취를 편년체編年體로 기술했다.

심재는 세상이 변하고 나라가 망해가는 큰 슬픔을 안고 춘추필법의 역사서로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김석익의 ‘탐라기년’
김석익의 ‘탐라기년’

한편 19187탐라기년을 인쇄 간행하고 또 젊은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면서 국혼國魂을 일깨웠다.

1916년 주변에서 한문서당 개설을 권장하자 이를 실행했다.

이때 강창보姜昌輔, 한상호韓相鎬, 김택수金澤銖, 김정순金正舜, 김정로金正魯, 고경흠高景欽 등이 심재의 문하에 출입하며 한문을 익혀 그 영향을 입어 민족 해방운동에 몸을 던졌다.

김석익이 38세 되는 1922년부터 10년 동안에 걸쳐 왕성한 온갖 정력을 쏟아 저술 활동에 몸바쳤다.

탐라인물고人物考, 파한록破閑錄, 유리만필儒理漫筆, 북행록北行錄, 근역시화槿域詩話, 천주교란기亂記 등을 비롯해 많은 글을 썼다.

큰형 석윤錫允은 한말의 의병 참모로 국권 회복을 기도한 열혈남아였다.

뜻과 같이 이루지 못하자 불교에 귀의하더니 뒤에는 민족종교에 심취, 미륵彌勒의 이상 세계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정읍 땅으로 옮겨 살았다.

그는 오직 학자의 외길로 가고자 하여 탐라기년속편續編을 쓰는데 전념했다.

이 속편은 1906(광무10)부터 1955년까지의 제주의 현대사를 쓴 것이다.

심재는 항일운동에 직접 몸을 내던지지 않았지만 붓을 들어 민족혼을 일깨우고 글을 통해 후진을 일깨우며 애국정신을 고취했다는 점은 독립 투사에 뒤지지 않은 공훈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변 : 필자가 학생 때에 선친께서는 심재는 종친이며 대석학이니 한번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라.”는 말을 듣고 찾아간 적이 있었다. 제주북교 근처 객사골의 자택으로 찾아뵙고 친절히 가르쳐 주면서 막힘 없이 설파하는 논리에 매료魅了되고 말았다. 후일 심재의 달관된 글을 보면서 나로 하여금 향토사에 관심을 갖게 된 연유가 이런 인연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다.

김석영金錫英제주시 삼도리에서 태어나 제주농업학교를 졸업. 광복 후 초대 제주의용소방대장. 향토사학자 김석익의 아우, 아들은 김진수와 김용수.

김석종金錫琮1871(고종8)~1921(일제강점기), 서당 훈장. 초명은 김철수金哲洙, 본관은 경주, 조천읍 함덕리에서 김한권金漢權의 아들로 태어났다.

향리에 한문 서당을 개설하여 문하생들이 조천읍 일대에서 몰려들었다. 그가 죽은 후 문하생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어 교학비를 세웠다.

건비인은 홍순경洪淳璟, 김종신金鍾信, 박두규朴斗圭, 홍순명洪淳明, 김기택金琦澤, 한희룡韓熙龍, 고성협高性協, 김석호金錫祜 등이다. 박두규는 조천 기미만세운동의 주동 인물이며 김석호는 국회의원을 역임한 명사이다.

김석진金錫振대정현감. 1888(고종25) 10, 윤정식尹正植의 후임으로 대정현감에 도임하고 18902월에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