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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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종, 서귀포지사장 겸 논설위원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건국한 조선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 519년간 27명의 왕이 통치를 했다.

이 가운데 연산군과 광해군 등 2명의 왕은 반정(反正)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들 군주는 죽은 후 신위를 종묘에 안치할 때 조(祖)나 종(宗)을 붙이는 묘호(廟號)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후 광해군의 역사적 기록은 한마디로 패륜을 저지른 폭군이다.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도 광해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가장 큰 위협이 됐던 영창대군을 역모사건으로 유배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고, 영창대군의 생모이자 자신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궁에서 내쫓아 유폐시킨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였다.

무리한 궁궐 보수 및 신축에 따른 민생 파탄,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매관매직 등의 폐해도 있었지만 폐모살제가 결정적 원인이 됐다.

▲요즘은 광해군의 긍정적 측면이 재조명되고 있다.

인조반정 후 정권을 잡은 서인 세력이 조선 멸망 때까지 집권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객관적이었을까 하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수도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피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분조(조정을 둘로 나눈 것)의 책임을 맡아 전쟁의 최전선에서 의병을 이끌었고, 왕위에 오른 후에는 대동법으로 조세제도를 개혁했다. 특히 명말청초(明末淸初)의 격동기에 중립 외교를 펼쳐 후금(훗날 청나라)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평가도 받는다.

세계 최강 미국과 G2로 급부상한 중국을 비롯, 러시아와 일본 등 한반도를 둘러싼 4강의 치열한 힘겨루기, 그리고 북한의 핵무장 등으로 한국의 외교·안보가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광해군의 실리외교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광해군이 1637년부터 1641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제주에서 4년의 유배 생활을 조명하는 전시회가 20일부터 11월 20일까지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제주 유배 문화 콘텐츠 발굴의 계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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