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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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경 수필가

거실 장식장 옆에 종이 하나 있다. 이 종은 집에 있는 소품 중에 가장 오래되어 보인다. 세상에 무관심 한 듯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다.

어느 날 남편이 지인에게서 받았다며 성덕대왕신종 모형을 가지고 왔다. 어떤 회사에서 기념품으로 제작한 것인데 오래된 분위기를 내려고 문양에 청록색을 입혔다. 억지스러워 처음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뒤 청소하다가 종치는 나무와 부딪쳤는데 의외로 맑은 소리가 났다. 떨리는 듯한 울림이 오래 여운으로 남았다. 이 에밀레종은 인신공양을 했다는 전설이 연상되어 더 애잔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성당에서 성체성사 때 들리는 종소리는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힘이 있다. 흩어졌던 마음이 가 닿는 자리에서부터 작은 파동이 인다. 눈을 감고 고요한 상태가 되면 세상은 마음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한 주 동안 부산하던 내 안에 작은 평화가 찾아온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집중하는 이 시간. 신부님의 목소리 사이로 맑은 종소리가 나를 이끈다. 의식의 한가운데서 울리는 종소리는 깊은 곳에 있는 내 영혼을 두드린다.

젊었을 때 다니던 직장 가까이에 정동교회가 있었다. 혼자 있고 싶어서 점심시간을 반납하고 달려가던 그 곳에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모스크바의 종이란 곡이 자주 흘러 나왔다. 크레믈린 궁전의 종소리를 듣고 느낀 것을 형상화한 곡이다. 종소리를 나타내는 장중한 피아노 소리가 곡의 처음에 들어있다. 축제일을 맞아 거리로 모여드는 모스크바 시민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피아노가 만들어낸 종소리의 화음을 듣고 있으면 내가 먼 여행지에 와 있는 것 같다. 이렇듯 피아노 곡 속에서 들리는 종소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곳으로 나를 잠시 데려가기도 한다.

음이 한 번 커졌다 줄어드는데 걸리는 시간이 맥놀이 주기이다. 에밀레 종은 사람이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주기와 같아서 더 자연스럽게 들린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그 순간부터 울림이 시작된다. 그 사람을 알아가고 나와 다른 면을 배워 가며 친해지는 과정에서 사람 사이에도 맥놀이 주기 같은 것이 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느끼며 마음을 주고받기 위하여 많은 얘기를 한다. 서로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한달음으로 달려갈 때 가슴 속에서도 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다가 숨어 있던 맨얼굴을 보게 될 때도 있다. 종소리는 여운이라도 있지만 사람 사이는 대부분 그렇지 않다.

종소리는 한결같을 텐데 내 마음에 따라 슬프게도 기쁘게도 들린다. 그렇다면 내가 오해할 수도 있으니 성급히 등을 돌리지 말고 상대방이 남긴 여운에 귀 기울여야 했던 것은 아닐까.

청소하다가 말고 잠시 멈추어 종을 쳐본다. 치는 손길이 정성스러울수록 울림은 오래 간다.

천 몇 백도의 온도에 쇳덩어리를 녹여 실패를 거듭하며 종을 완성하기까지 걸렸던 시간과 정성을 생각해 본다. 그래서인지 절이나 교회 같은 기원을 하는 공간에서 종을 자주 볼 수 있다.

동 트기 전에 산중턱에 있는 절에 올라간 간 적이 있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아 무서웠는데 새벽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침묵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듣는 종소리는 나를 바라보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비록 이 종이 에밀레종의 모형이지만 그 속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나를 진품에 가까이 가도록 변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천천히 종을 쳐본다.

나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달리 들리지만 서두르지 않고 여운이 끝나기를 기다리면 내 생각도 가지런히 정리되겠지.

어쩌면 종소리는 누군가가 보내는 메시지가 되어 마음이 좁아질 때마다 다시 넓혀 줄 것 같다. 일상의 틈 사이로 들어와 은은하게 내 영혼의 문을 두드리는 종소리.

그 울림 사이로 인정과 너그러움이 스며든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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