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외적 침입 대비해 성곽 다듬고 감시 시설 ‘정원루’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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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철, 중종 때 대정현감·제주목사
김석희, 제1회 한국번역대상 수상해
김석호, 국회의원·제주신문사 사장
김선옥, 제10대 제주도지사 등 역임
김선희, 형 김영희와 도의원 동반 당선
제주시 남문사거리 인근에 있었던 1910년대 제주성 남문 모습. 성문 위에는 사방을 살피기 위해 정원루(定遠樓)가 설치됐다. 제주목사 김석철은 1512년(중종 7년) 제주성 남문의 옛 누각을 허물고 거기에 새로 정원루를 지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사진 : 제주시 발간-제주성(濟州城) 총서]
제주시 남문사거리 인근에 있었던 1910년대 제주성 남문 모습. 성문 위에는 사방을 살피기 위해 정원루(定遠樓)가 설치됐다. 제주목사 김석철은 1512년(중종 7년) 제주성 남문의 옛 누각을 허물고 거기에 새로 정원루를 지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사진 : 제주시 발간-제주성(濟州城) 총서]

김석철金錫哲1456(세조2)~?, 무신. 대정현감, 중종 때의 제주목사. ‘관안선생안에는 모두 그 이름이 없으나 다만 연산군 말기나 중종 초 대정현감에 재직한 것으로 추정된다. 1490(성종21) 부장部將이 되고, 이어서 남포현감·훈련원판관·제포첨절제사를 거쳐 1500(연산군6) 훈련원첨정, 1506년 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그는 1509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때 제포·부산포의 항거왜인恒居倭人들이 대마도주의 내원을 받아 살인, 방화, 약탈을 하는 등 삼포왜란을 일으키자 즉시 조정에 보고, 중앙에서 출동한 군대와 합세해 이를 진압했다.

이어서 경상우도 방어사가 되었으나, 제주도 방어의 중요성이 제고됨에 무재武才가 특출한 자로 지목되어 1511(중종6) 1월 장임張琳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도임하게 됐다.

그는 재임 중 방어에 대비해 성곽 보수에 착수, 제주성 남문에는 옛날 누각이 있었는 데 그것을 허물고 거기에 1512(중종7) 새로 정원루定遠樓를 지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또 독실纛室과 좌우랑무左右廊撫를 수리하고, 관덕정 동쪽에 군영軍營 18칸을 새로 건립하니 민가에 투숙하던 병졸들이 매우 편해졌다.

또 진무소鎭撫所를 설치해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군량미를 비축하기 위해 관창官倉 10칸을 건립, 외침에 대비했다. 또한 제주향교의 동·서무東西撫를 보수하고 개와改瓦 했다.

전에 있던 좌우아랑左右衙廊은 객사 문밖에 있었던 것을 관덕정 쪽으로 옮겨 호남에서 증원병이 오면 기숙하게 했다. 증원병이 호남으로 귀환해 버리면 이 건물은 심약審藥·검율檢律·왜학倭學·역학譯學·무학武學·진무鎭撫·지인知印·기보병騎步兵 등의 거소로 활용했다.

그는 목민관으로 취임 후 외적에 대한 방어 수비와 사병·군마軍馬의 축적을 그전보다 배가시켰다. 1513년 한성좌윤이 되어 상경, 군사의 부실, 호활豪猾들의 양민 모점冒占, 양마의 상잡 등 제주의 폐막을 논하고 그 시정을 촉구했다.

그가 심혈을 쏟아 건립한 정원루에 대해 강혼姜渾이 지은 정원루기定遠樓記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김석희

김석희金碩禧1954~. 본관 광산. 소설가, 번역가. 김석희는 제주시 노형동에서 태어나 제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및 불문학과 졸업.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번역서가 다수 있다.

김석희는 제1회 한국번역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애월읍 신엄리<새엄쟁이> 바닷가에 주택을 마련해 거주하고 있다.

김석호金錫祜1897(광무1)~?(분단시대), 정치가, 국회의원. 언론인. 본관은 김해. 조천읍 함덕리<서산>에서 태어나 향리에서 한학자 김석종金錫琮(1871~1921)에게 한문을 배웠다.

1916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함덕사숙 교사로 재임했다. 청년 운동에 참여, 1925년 함덕청년회 대표로서 제주청년연합회에 가맹해 집행위원이 되었다.

김석호
               김석호

해방 후 오현중학교 창설에 힘을 쏟아 오현학원 상무이사, 194761일 제주상공회의소가 결성되어 초대회장이 되었다. 1945101일 제주신보가 창간되면서 초대 제주신문사 사장으로 선임됐다. 서북청년단 단장 김재능이 발행인이 되고 김묵金黙이 편집국장이 되어서 발행하다가 19491012일 계엄령이 해제되자 김석호 사장은 서북청년회에 강력히 항의해 법에 호소한 끝에 얼마 후 경영권을 회복했고 김석호 사장은 지방 언론 창달에 기여했다.

그는 1954520일 실시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북제주 갑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7862표를 얻은 김영린金永璘(43·아라)을 누르고 9908표로 당선돼 곧 자유당에 입당했다.

김선옥金善玉1908(융희2)~1974, 행정가, 10대 제주도지사. 본관은 김해이며 三賢-김침, 애월읍 금성리<모실->에서 김철희金喆禧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제주농업학교를 3년을 거쳐 19303월 광주농업학교를 졸업했다. 전라남도 장성군청長城郡廳에서 근무하던 중 조국이 해방되었다.

그는 제주도청으로 옮겨 농무과장, 사회과장, 지방과장, 남제주군수, 산업국장 등을 역임했다. 곧이어 민주당 정부가 수립되고 양제박梁濟博 도지사에 의해 총무국장으로 기용됐다.

19604·19 혁명에 의해 430일 전인홍全仁洪 도지사가 전격 해임되고 좌문규左文圭 총무국장도 사표를 제출하자 김선옥 산업국장은 동년 10월 도지사 업무를 대행하게 됐다.

김선옥
               김선옥

동년 12월로 예정된 민선지사民選知事 선출을 불과 2개월여를 앞둔 동년 107일 제10대 제주도지사로 발령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도지사로 취임 후 도정 방침을 관기官紀 확립, 인사 적정, 민의 존중, 민력 배양으로 정했다.

19591024일에는 사라호 태풍 피해 복구로 공용어선共用漁船 58척분 국고보조 1300만환과 자기자본 11388000환으로 건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2t 이상 5t 미만으로 제주시에 19(42t), 한림 10(20t), 서귀 11(29t), 성산 7(15t), 추자 12(24t)으로 정해 배정되자 김지사는 매우 기뻐했다.

1960123일 자로 사표를 제출한 김지사는 1229일에 실시되는 도지사 선거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도지사 선거에는 김선옥, 양남전, 김영진金榮珍, 강성익康性益, 양제박 등 5명이 등록했다.

투표 당일인 19601229일에 도전역에는 전날 밤부터 갑자기 몰아닥친 폭풍과 폭설로 전기와 전화가 단절되고 교통마저 마비되어 투표를 어렵게 하였다. 이 때문에 유권자 142980명 가운데 63.2%9435명만이 참가했고 역대 선거 가운데 가장 저조한 투표율을 기록했다.

개표 결과 강성익(71·법환) 후보가 23673표로 당선되고 김선옥(54·금성)22427표를 얻어 당선에 실패, 그는 결국 재임 2개월이란 최단명 도지사로 기록되었다.

김선희金瑄熙1926~?, 호는 나암羅巖, 제주도의원, 김해김씨, 애월읍 애월리<->에서 애월면장 김도현金道鉉3남으로 태어나 제주도의회 초대 도의원 선거에 형 김영희金瀛熙와 동반 당선되어 화제話題가 되었다.

앞서 1944년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광주사범 강습과 1년 과정을 거쳐 1년 동안 교사생활을 하고 우리나라가 해방되자 광복군 이청천李靑天의 노선에 동조해 대동청년단에 가입, 청년운동으로 건국에 힘을 쏟았다.

2대 도의원 선거에 애월읍 소선거구에 의해 장용직張龍職과 가장 치열한 선거전 끝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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