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는 해상교역의 중심지…고급유물이 곳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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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 제사유적지서 통일신라 도기·당나라 청자 파편 등 발견돼
‘대다수가 고급유물’ 제사 행해졌음 뜻해…여러 지역과 교류도 암시
포제단서 풍어·안녕 등 빌어…매년 마을제 운영위 중심으로 열려
제주시 용담동 제주향교 서북쪽 담장 너머에 있는 제사유적지.
제주시 용담동 제주향교 서북쪽 담장 너머에 있는 제사유적지.

제주시 산지항에서 발견된 한나라 시대의 화폐, 구리거울, 용담동 무덤유적에서 출토된 장검(長劍), 단검, 끌형무기, 주조(鑄造)도끼 등 수십 점의 유물은 한대 당시 이미 활발한 해양교역이 이뤄졌음을 반영하는 자료들이다.

산지항에서 출토된 화폐들은 탐라사회를 이끌 수 있었던 정치권력 계층이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탐라가 무리 또는 부족 사회단계를 넘어서 위계질서와 조직을 가진 사회, 국가단계 전인 추장(酋長, chiefdom)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통일신라시대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독립된 지위를 누렸던 탐라는 1105년 이후 고려에 복속되고, 이어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한반도의 중앙집권체제 속으로 흡수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번 역사문화 걷는길은 탐라사회를 이끌던 사회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용담동 제사유적지를 돌아보고, 조선중기 유교제법이 보급됨에 따라 남성들이 포제를 지냈던 용담1동 포제단을 둘러본다.

용담동 제사유적지

제주시 용담동 제사유적은 제주향교 서북쪽 담장 너머에 있다. 이를 알리는 안내판이나 표지석은 아직은 없다.

1992년 제주시 의뢰를 받아 이 지역 100여 평에 대한 발굴조사에 임했던 제주대박물관(당시 관장 이청규) 조사팀은 이 곳에서 수백 점의 통일신라시대 회색도기 파편을 비롯한 옥()제품, 금동 혁대, 중국 당나라 시대의 청자(주전자) 등을 수집했다.

그러나 이 도기들은 철저히 깨어진 채로 버려져 있었다. 도자기들은 당시 제주에서는 자체 생산되지 않는 수입품이었다.

한천과 병문천이 바다로 이어지는 해안 저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상대적으로 높은 언덕에 위치한다.

고대 제주도의 관문이었던 산지천은 물론 한천과 병문천 포구로 들어오고 나가는 배의 동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지역이다.

당시 유적발굴에 나섰던 이청규 관장은 용담동 유적이 원거리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유적(祭祀遺蹟)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7~10세기경 통일신라 토기인 회색도기인 병과 항아리가 주로 발견됐다.

이 유물들은 깨어지거나 폐기된 상태로 출토 됐으며, 회색도기는 철기 등의 생활필수품과 함께 해외교역을 통해서 입수됐던 귀한 물품들이었다.

특이한 점은 이 유적에서 출토되는 나팔관의 목 긴병, 금동제허리띠 장식, 유리구슬 등이 모두 고급유물이었다는 점이다.

즉 단순하게 폐기할 수 있는 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처럼 흔치 않은 고급물품이 일정지점에 집중적으로 폐기된 것이다.

생활용기는 거의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8세기 이후 탐라국의 활발한 조공외교로, 배를 떠나보낼 때마다 항해와 안녕을 비는 제사행위가 이곳에서 행해졌음을 시사하는 고고학적 증거라고 볼 수 있겠다.

원거리 항해를 하는 출발지와 가까운 곳에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는 점과 출토된 유물이 서민의 생활유적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고급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신에게 제사를 지낸 뒤 그릇을 깨는 행위는 세계 각지에서 행해져왔던 당신앙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용담 제사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통일신라시대 도기편과 당나라 시대 것들로 이들 지역과 해상교역이 있었음을 유추케 한다.

산지항과 용담동에서 발견된 한대(漢代)의 화폐유물은 탐라전기인 서기 원년에서 500년 사이에 이미 중국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주호(州胡: 제주의 옛 이름)가 한()과도 교역을 했다는 기록은 탐라시대 초기부터 삼한 등 남해안 지역과도 해상교역이 이루어져 왔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백제에 조공을 바쳤던(문주왕, 476) 탐라는 신문왕 시대로 추정되는 신라성시(新羅盛時, 680년 전후)에 이미 신라에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관계를 맺기도 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함에 따라 661년 당나라가 중국 태산에서 국제간의 화약(和約)을 맺기 위한 자리에 백제, 신라, 일본의 사신과 함께 탐라사신도 독자적으로 참가했다고 여러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661년부터 693년까지 32년간 탐라는 13회에 걸쳐 일본에 조공을 바쳤고, 일본에서는 탐라에 사신을 2회 파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외국과의 빈번한 이러한 기록들은 주변국에 비해 열세인 위치에 처해 있던 탐라가 해상외교를 통해 국운(國運) 개척의 활로를 열어가려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용담동 포제단 정문 모습.
용담동 포제단 정문 모습.

용담동 포제단

조선중기 이후에는 유교제법(儒敎祭法)이 보급됨에 따라 남성들이 당굿에 참여하지 않고 별도로 포제를 지내게 된다. 포제( )란 정월과 유월에 지내는 동제로, 이삿제·거릿제·천제·산천제·마을제·포신제 등으로 불린다.

고을에서는 지금도 마을사람들의 불상사를 예방하고 오곡의 풍성을 기원하고, 농사의 풍년과 축산의 번성, 바다에서의 풍어, 자손의 창성을 위해 포제단에서 치성을 드린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쌀을 모은 제물인 성미(誠米)를 올렸으나 지금은 마을공동자금으로 운영되기도 한다. 본향당제가 낮에 지내는 것에 반해 포제는 고요한 한밤중에 제를 지내는 고사와도 같은 제의라고 할 수 있다.

포제단은 사람과 사물에게 재해를 주는 포신에게, 액을 막고 복을 줄 것을 빌던 제단이다. 서울과 제주도 두 곳에 있었는데, 서울서는 제단을 별도로 만들지 않고 마보단(馬步壇)에서 지냈다.

포신( )은 재해를 내리는 신이므로, 포신에게 재해를 내리지 말기를 바라는 제의가 바로 포제의 원래 취지이기도 하다.

포제는 농업과 어업에서 풍요와 풍어와 함께 마을의 안녕과 화합을 염원하는 제의이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맞닥뜨리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생산 활동에서의 무사안전과 풍어를 비는 정성스러운 마음들이 이러한 제의들을 통해 드러나는 점이 매우 인간적이고 자연친화적이라 여겨진다. 용담동 포제단은 노인회관 남쪽에 있다.

특히 마을제는 5~6인으로 구성된 마을 자치조직인 마을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치러진다. 회의 조직을 보면, 원로인 향장을 두고, 위원장, 총무, 감사, 간사를 두었고, 이들이 해마다 마을제를 주관한다.

제청은 4년 전부터 경노당 안의 지역을 쓰는데, 포제는 제청에 입소하여 3일 동안 정성을 하고, 돼지를 희생해 초정일 후일제로 치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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