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쉼표
일상의 쉼표
  • 제주신보
  • 승인 2019.08.2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영희, 수필가

휴가철이 막바지다. 힘겹고 답답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너나없이 다투듯 나서던 계절이다. 바다는 역동적으로 젊음이 넘치는 곳이다. 수면 위로 힘차게 튀어 오르는 물고기 같은 열정을 태양과 함께 뜨겁게 달군다.

그 틈에서 어울리기엔 쑥스러워 내 안에 바다를 품고 푸른 물결로 출렁일 뿐이다.

산의 품은 넉넉하고 깊어 과묵한 남성 같다. 삶의 의미를 찬찬히 관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겨울 산은 봄을 준비하는 예비의 시간이다. 여름은 나무들끼리 어울려 숲을 이루고, 많은 생명을 품어 키워낸다. 다투지 않고 자기 영역을 키워 가는 평화로움이 눈에 들어온다.

한때 명산을 찾아 떠났던 곳에서 심신이 말갛게 개면서, 호수 같은 하늘과 짙푸른 녹음이 후덕한 친구처럼 다가왔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은 처음인 것처럼 감동적이었다.

결혼한 여자에게 만만하게 쉴 곳은 친정이다. 어머니가 사시던 시골집이 그대로 있다면, 외갓집에 외할머니가 생존해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훌쩍 달려갈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을 것을. 나이 들어 돌아갈 친정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나는 어느새 친정어머니로, 내 집은 고향집이 되어 아이들을 기다리는 할머니가 되어 있다.

고향에도 하룻밤 묵을 마땅한 곳이 없다. 친척 어른들도 모두 연로하신 분들이다. 옛집에서 풍기는 쿨쿨한 냄새조차 정답고 누룽지처럼 구수하게 다가왔었다. 게걸스럽게 허겁지겁 먹었던 토속음식은 허기진 심신에게 보약이었다. 기별 없이 예사로 찾아갔던 게 언제부턴가 피차 부담스러운 일이 됐다.

내 버킷리스트 중 한 가지는, 한적한 산촌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소망이다. 내게 이런 선물 한 번쯤 선사한다면 최고의 휴식이 될 것 같다.

산골 아낙이 지은 강낭콩 듬뿍 섞인 보리밥이 그립다. 이슬 맞은 풋고추를 강된장에 찍어 먹는 시골 밥상을 상상만 해도 입맛을 다시게 한다. 산의 정기를 듬뿍 먹고 자란 담백한 산나물을 매운 고추장에 쓱쓱 비빈 맛깔스러운 산나물비빔밥. 도시의 들척지근한 음식에 길들여진 맛에 비교할 바 아니다.

바람을 껴안고 이파리끼리 살을 비벼대는 청량한 소리, 숲을 헤집고 쏟아지는 시원한 소나기, 새벽잠을 깨우는 부지런한 새들의 노랫소리는 심신을 정갈하게 한다. 늘 얕은 잠에 시달린다. 산산한 새벽바람을 품고 늦잠 한번 늘어지게 자고 싶다. 자갈을 굴리며 흐르는 계곡물에 발 담가 앉아 삶을 사유할 수 있는 시간, 그런 소소한 호사를 누렸으면 한다.

여행길이 노상 즐겁고 행복한 건 아니나, 그래도 떠나고 싶다. 욕망이 나를 식지 않게 하는 것 중 한 가지는 여행이다. 불꽃같은 역마살을 꾹꾹 눌러 재우고 있다. 가방을 꾸릴 날이 그리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성급한 불안감은 점차 조급증으로 바뀐다. 미리 여정을 잡을 수 없는, 함부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초조함이다. 숨 가쁘게 달려왔던 일상에 쉼표가 필요하지만, 휴가는 단순히 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슴에 가득 담아 두었던 것들을 덜어내는 일,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오는 일은 집을 떠나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더위가 꼬리를 내리고 있다. 훌훌 벗어났던 날이 저물어 간다. 여행 가방 속을 어떻게 챙겨 왔는지. 떠났던 순간을 돌아 볼 시간이다. 결실의 계절이 다가온다. 충전으로 넉넉해진 에너지로 무엇을 거두어들일지. 올가을에는 잘 영근 열매 가득 가슴에 품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