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돈의 양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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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허자, 광주대각사 주지·제주퇴허자명상원장

우주 대자연의 섭리는 음과 양의 조화에서 비롯된다고 보아진다. 고저대소장단(高低大小長短)이 그렇고 빈부고락귀천(貧富苦樂貴賤)이 그러하다. 이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와도 무관하지 않으며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존재한다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대자연의 섭리는 우리의 삶과도 직결되어 있어서 언제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자연의 이치에 따라 순응하는 삶을 살아갈 때 행복이 보장된다는 깨우침을 많은 성현들은 말씀해 주셨다. 그 한 예로 공자께서 말씀하신 ‘순천자(順天者)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라는 말씀을 들 수가 있다.

오늘 여기서 거론할 ‘칼과 돈’ 역시 이러한 음양론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런데 왜 갑자기 칼과 돈이 등장했느냐 하면 하도 요즘 세상사가 뒤숭숭하여 소중한 인명을 경시하고 물질과 조건만을 앞세우는 경박한 세상으로 돌변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워 한 번 쯤 경책(警策)하고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자는 취지에서 펜을 들었다.

칼과 돈은 어떻게 다르며 그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선 칼은 갈아서 날을 세워 쓰는 것이며 돈은 벌어서 뜻을 세워 쓰는 것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양면성(兩面性)이 있다는 것인데 마치 야누스의 두 얼굴이요,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닮았다.

칼과 돈은 사람의 손에 의해서 휘둘러지는 속성이 있는 바 이를 두고 쓰임새라 한다. 칼을 잘못 쓰면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잘 쓰게 되면 사람을 살려내기도 한다. 따라서 흉기(凶器)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이기(利器)가 되기도 한다. 또 돈 역시 쓰기에 따라 이해(利害)가 엇갈린다. 이처럼 칼과 돈은 양면성이 상존한다. 그러므로 칼과 돈은 우리의 마음처럼 관리의 대상이다. 이들을 잘 관리하면 성공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에서도 이미 시사된 바가 있지만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선(善)과 악(惡)의 이중성이 자리 잡고 있다. 선한 마음이 작용할 때는 한없이 착하다가도 악한 마음이 요동칠 때는 끝없이 악당이 된다. 우리가 살면서 교육을 받고 문화를 향유하는 것도 모두 이 마음을 순화시키는 것이며 보시(布施)를 행하고 서로 돕고 사는 것 역시 우리의 선근(善根)을 증장시키는 것이다. 선한 마음으로 살든 악하게 살든 선택은 자유지만 금생(今生)애 착하게 살아야 다음 생에도 선연(善緣)들을 만나게 된다.

요즘 우리 사회상을 보면 너무나 막가파(?)들이 판을 친다. 마치 한 세상만 살다갈 것처럼 다음 생에 대한 기대나 애착은 전혀 없다. 막말은 막판에 가서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말이나 행동은 항상 삼가야 한다. 말을 함부로 하면 한낱 소리일 뿐이요 쓸모 있는 말을 해야 ‘말씀’이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칼은 칼답게 쓰고 돈은 돈답게 쓰고 살자. 군군신신부부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말이 있다. 곧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라는 말인데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래야 우리 사회가 행복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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