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지방민들 학문의 기회 열려…향교 출입 자체가 특권의 상징
(10)지방민들 학문의 기회 열려…향교 출입 자체가 특권의 상징
  • 제주신보
  • 승인 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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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향교, 인재 양성 산실…공자 모시는 대성전·공부방인 명륜당 등 배치
국가에서 토지와 노비 하사받아 운영…군역 면제받기 위해 서당 출입 인기
1920년대 제주항 개발로 제주성 일부만 남아…옛 축성법 담겨 자료 가치 커
제주시 용담동 제주향교 대성전의 모습. 향교와 서원은 인재 양성과 유교 이념을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제주향교는 세워질 당시 지금의 중앙로인 교동에 있었으나 여러 번 옮겼다가 지금의 용담동 현 위치에 이른다. [제주신보 자료사진]
제주시 용담동 제주향교 대성전의 모습. 향교와 서원은 인재 양성과 유교 이념을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제주향교는 세워질 당시 지금의 중앙로인 교동에 있었으나 여러 번 옮겼다가 지금의 용담동 현 위치에 이른다. [제주신보 자료사진]

1392년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 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됐던 제주향교.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이곳은 봄·가을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제주향교를 지나면 바로 제주성지에 위치한 목관아와 이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제주향교 내부 안내지도.
제주향교 내부 안내지도.

제주향교

향교와 서원은 오늘날의 학교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향교와 서원은 인재 양성과 유교 이념을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당시에는 토호세력들의 정치사회적 활동을 보장해 주던 근거지이기도 했다. 귤림서원에 있는 향현사는 지방출신의 이름난 학자를 모신 사당이며, 이아 근처 북서쪽에 있는 향사당은 지방자치의 근거지였다.

제주에는 학교가 없어 토관들이 글을 모르고 법제를 알지 못하여 대개 어리석고 방자하여 작폐가 심하므로 교수관을 두어 10세 이상의 토관 자제를 교육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어, 제주목에는 조선의 태조 원년인 1392년 전국에서 일찍 향교가 세워졌다.

이후 조선의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정의현과 대정현이 설치되고, 11교의 원칙에 따라 현에도 향교가 설립되었다. 향교의 배치 구조는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과 선현의 문묘를 모시는 동·서무 그리고 공부방인 명륜당, 기숙사인 동·서재로 되어 있다.

제주향교는 세워질 당시 지금의 중앙로인 교동에 있었으나 여러 번 옮겼다가 지금의 용담동 현 위치에 이른다. 대정향교는 1420(세종 2) 성안에 세웠다가 1653(효종 4)에 지금의 단산 자락으로 옮겨졌고, 정의향교는 1420년 성산읍 고성에서 문을 열었다가 읍성이 성읍으로 옮기면서 향교도 옮겨졌다.

향교의 학생 수는 제주목에 90, 대정현과 정의현에 각각 30인을 두도록 하였으나, 대개 그 수를 초과했다.

초과됐던 이유 중 하나로는 학생으로 등록되면 군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령은 달마다 시험을 실시해 성적이 좋은 자에게는 역을 감해주기도 했다. 제주에서는 향교에 출입한다는 자체가 특권의 상징이었으며 향직을 유지하는 수단이 됐다.

향교의 교육은 제주목에는 교수관을, 대정과 정의에는 훈도를 두어 실시했고, 운영 경비는 국가에서 지급된 토지로 충당했으며 노비까지 하사받았다.

제주에 정착한 유배인들이 세운 서당과 함께 제주에 부임한 목사들에 의해 서원과 서당이 설립되기도 했다. 다른 지방에서는 서원과 서당이 그 지역의 유지들에 의해 주로 설립된 것에 비해, 제주지역에는 유학자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당으로 조선전기에는 향학당, 김녕정사, 월계정사 등이 있었다. 후기에는 삼천서당, 정의서당, 대정서당, 삼성서원 등이 세워졌다. 군역을 면제받기 위해 서당 출입이 많아지자 서당을 폐쇄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 그림은 탐라순력도 41화폭 중의 하나인 제주전최로, 관리의 치적을 심사하는 자리이다. 목관아와 이아, 특히 제주성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위 그림은 탐라순력도 41화폭 중의 하나인 제주전최로, 관리의 치적을 심사하는 자리이다. 목관아와 이아, 특히 제주성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제주성지

제주성은 제주시내 중심지를 빙 둘러 축조됐다. 언제 처음 쌓아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411(태종11) 정월 제주성을 정비하도록 명했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제주성은 1411년 이전에 축조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곽의 둘레는 4394, 높이는 11척으로 기록돼 있다. 1555년 을묘왜변 이후인 1565(명종) 곽흘 목사가 성안의 우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산지천 동쪽으로 성곽의 위치를 확대하고 격대와 타첩을 갖추었다. 1599(선조32) 성윤문 목사가 가축(加築) 즉 성벽을 더 쌓았다. 이어 1780(정조4) 김영수 목사가 산지천이 범람해 민가에 피해가 많자 이를 대비해 산지천 서안으로 간성(間城)을 축조하는 등 지속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제주항을 개발하면서 성벽을 허물어 바다를 매립하는 골재로 사용하면서 제주성 본래의 자취는 대부분 사라지고, 게다가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의 손에 의해 대부분 사라져갔다. 그러나 탐라순력도와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성벽은 옛 성의 축성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금의 오현단 남쪽의 복원된 성담은 17세기 귤림서원이 들어서기 전에 산지천을 자연해자로 하는 제주성지였다.

여러 기록에서 보면 탐라국 시대의 고성은 북으로는 해안을 끼고, 동성은 산지천 서안을, 서성은 병문천 동안을 각각 경계로 삼아 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