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初心)
초심(初心)
  • 제주신보
  • 승인 2019.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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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맨 처음 가졌던 마음이 초심이다. 학생 때 지녔던 꿈은 자체로 초심이다. 풋풋하고 싱그러웠다. 취업 전후 감사하던 마음도 초심이다. 이건 상황에 따라 밑동에서 흔들리기 십상이다. 여차하면 퇴색해 빛깔마저 찾지 못하기도 한다. 초심을 잃지 말라, 말은 쉬워도 실천은 어렵다.

글쓰기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막 등단한 신인에게 초심을 잃지 말라고 얘기한다. 끊임없는 수련으로 내공을 쌓아야 하는 게 문학이니 정진하라고 격려하는 선배의 곡진한 말이다. 얼마 안 가 식어 버린다. 자기도취에 빠지면서 데뷔 적의 열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목월 시인은 ‘5년’을 얘기했다. 그쯤 해야 빠듯이 문인으로 서게 된다는 고언(苦言)으로 들린다. 매너리즘을 불러오면 종국에 도태된다 함이다.

한데도 우줄대고 나불대며 까분다. 겸양해야 함에도 웬 심보인지 거만이 발동한다. ‘나만큼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쯤 되면 그의 문학은 멈춰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천부적 재능이란 것도 성실이란 토지에서 움트고 우거지는 씨앗이다.

초심을 잃었다는 말이 더 무겁게 들리는 경우가 있다. 현실의 높은 벽과 난관에 부딪쳐 차츰 변해 간다면 그건 초심을 잃는 명확한 조짐일 것이다. 그 변화가 긍정적이 아닌 부정적인 쪽으로 흘러갈 때는 이미 초심이 떠난 상태다. 정열적이다 해이되기 시작해 이완으로 속력이 붙는 것을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온다.

가까이서 초심을 잃고 있다 충언한다면, 이는 과거 회귀적 반성이 아니다. 미래지향적 성찰에의 제안이다. 하지만 이왕에 고삐 풀려 잃은 걸 찾아다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는 게 옳다. ‘초심을 잃고 있음’은 타성이 상당히 눌어붙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애초 초심을 꺼내는 건, 자리가 달라졌을 때 달라진 시야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변화가 오만으로 가선 안된다는, 그러니 그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훈계의 말이다.

정치를 잘해 기필코 국리민복을 실현하겠다는 마음가짐이었으나, 권력에 맛을 들여 타락해 버린 군주나 정치인, 그들은 놓쳐선 안되는 걸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초심 이다. 어느 지도자인들 초심이 없었겠는가. 처음엔 다 가슴 벅찼고 순수했고 뜨거웠으며 당당했다.

뜬 눈에도 안 보이는 게 권력인가. 자리에 앉자 이내 그 초심의 고귀한 가치는 세포 조각처럼 떨어져 나가 깨끗이 휘발하고 말지 않는가.

현 정부의 산파는 ‘촛불’이었다. 촛불은 빛을 발해 어둠을 밝히려 제 몸을 불태운다. 희생의 화신, 영혼의 언어다. 세계가 놀란 광장의 촛불은 찬연했다. 그동안 고이 배양해 온 민주주의를 위한, 피땀으로 가꿔 온 자유 시장경제를 살려 낸, 우리만이 해낼 수 있던 시도가 성공이었지 않나. 민주주의의 완성은 이제 목전이다.

촛불의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흔들려선 안된다. 흔들리면 촛불이 무색해진다. 누가 광장으로 나가라 해 밝힌 촛불이 아니다. 그건 거대 민중이었다. 초심을 잃는다면 촛불로 태어난 정권도 무의미하다. 촛불을 넘어야 하는 이유다.

“처음에 부지런하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게을러지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나중을 삼가기를 항상 처음처럼 하십시오.”

한명회가 성종에게 남긴 유언이다. 곱씹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