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의 격, 여자의 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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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 수필가

리모컨을 누르던 손가락이 어느 홈쇼핑에서 멈춘다. 팔고 있는 건 명품가방이다. 깔끔한 디자인에 적당한 사이즈가 딱 내 취향이다. 면세점에선 눈길도 주지 않던 내가 지금 명품가방을 탐색 중이다. 선명하게 찍힌 로고가 아니라면, 일곱 자리 숫자가 아니라면 하면서 채널 고정이다.

머릿속에선 이미 그것과 내가 가지고 있는 옷들을 매치해본다. 원피스에 어울릴까, 아니면 캐주얼에 어울릴까. 명품이니 무엇엔들. 달콤한 쇼호스트의 유혹에 점점 솔깃해진다. 이참에 나도 명품으로 좀 세워볼까.

지난 사월 버스를 타고 경기도에서 종로로 가는 중이었다. 날씨는 흐리고 쌀쌀했다. 내 옆에는 60대로 보이는 멋쟁이 여자가, 통로 건너에는 그녀의 일행 둘이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고, 나는 그 수다를 통해 그들이 명동으로 여고 동창회에 가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

그들의 수다를 들으며 잠시 졸았던가. “어머, 어떡해. 비가 오네.”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차창엔 굵은 빗방울이 부딪히고, 버스는 서울로 들어가는 톨게이트를 막 지나는 중이었다. 우산이 없는데 어쩌지. 비를 맞지 않고 바로 지하로 들어갈 수 있는 정거장이 어디더라. 나름 궁리를 해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옆자리의 여자도 뭔가 다급해진 듯 가방을 열고 부스럭거리더니 파란 수건을 꺼냈다.

머리라도 가릴 요량인가 했는데 그녀는 그걸로 가방을 둘러 묶었다. 그걸 본 그녀의 친구가 쿡쿡 웃으며 간섭을 했다. “신발은 어떡할래? 명품이잖아. 비닐봉투라도 주까?” 설마 했는데, 그녀는 친구가 건넨 검정 비닐봉투에 발을 쑥 집어넣더니 주둥이를 묶었다. “모피는?” 이번엔 통로 창 측에 앉은 친구가 끼어들었다. “별 수 있니? 말아 안고 뛰어야지. 하필 비는 내리고 지랄이야. 폼 좀 내려 했더만.” 그녀는 창밖을 보며 구시렁거렸다.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어머 어머, 큰일 났다야.” 자신은 명품이 없어 걱정 없다던 건너편 창 측 여자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남 걱정할 처지가 아냐. 오늘따라 머리에 흑채를 잔뜩 뿌려왔지 뭐니?” 셋은 꼬꾸라지며 웃느라 난리가 났다. 엿듣고 있던 나도 그만 쿡, 웃음이 나왔다. 비에 젖은 흑채라, 그건 진짜 걱정이 되겠다. 모피를 말아안고 수건으로 묶은 가방에, 발에 검정 비닐을 두르고 도심을 뛰어가는 여자의 품위는? 글쎄다. 버스는 종로에 도착하였고, 나는 그녀들을 뒤로 한 채 버스를 내렸다. 그리곤 근처 잡화점으로 뛰어들어가 우산을 샀다.

종종 명품 한둘쯤은 있어야 어느 자리에 가도 초라해 보이지 않는 맵시를 낼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명품백을 들면 없던 자존감도 생긴다 한다. 대여점도 호황이고 중고백도 불티나게 팔린다. 솔직히 보는 눈이 젬병인 나도 명품은 좋아 보인다. 얼마 전 한 선배도 친구에게 명품백을 받았다며 카톡으로 자랑해왔다. 중고도 기백을 쳐준다는 백이었다.

며칠 뒤 그것과 똑같은 것을 지하철에서 보았는데, 가방 주인은 가격도 사악하다는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건 백프로 짝퉁이다. 그것도 폼 나게 들고 다니면 명품으로 봐 줄까?

아마도 특별히 눈 밝은 이가 아니라면 그럴 거다. 선배는 그 가방을 들고 그 격에 맞는 차림으로 폼을 내고, 입장료가 만만찮은 뮤지컬을 보려 다녀왔다고 했다. 나는 선배에게 똑같은 백을 보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중에 가방은 짝퉁이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쇼호스트는 명품에도 격이 있다, 진짜 명품을 아는 여자는 명품 중에도 명품만을 선택한다, 여자는 무리를 해서라도 스스로 자신의 격을 높일 줄 알아야 한다, 기회는 지금이라며 은근 자존심을 겨냥한다. 솔깃하던 내 귀에 그 말이 거슬린다.

어떻게 가방으로 여자의 격을 세우겠나. 때론 내로라하는 명품이 사람을 더 구차하게 만들더만. 그렇다면 3초백이라 불리는 흔하디흔한 명품도, 그 비스름한 짝퉁도 없는 나는 격이 어떻게 되려나. 에라, 누군가 내가 든 가방으로 격을 더 높이 매겨준다면, 그리고 명품으로 없는 격을 세울 요량이라면 차라리 그 격은 없는 게 낫겠다. 쇼호스트의 빠른 말투에 급 피로가 몰려온다. 이제 그만, 로그아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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