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적거터·향사당 등 제주 중요 문화유적 간직
광해군 적거터·향사당 등 제주 중요 문화유적 간직
  • 제주신보
  • 승인 2019.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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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내 남강 이승훈 적거터·칠성대 등 있어…국민은행 앞엔 광해군 적소터 비석 
향사당, 고을 사람들 활쏘기·잔치 하던 곳…제주 최초 여성교육기관 신성여학교 설립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향사당은 봄과 가을 두 차례 고을 사람들이 모여 활을 쏘거나 잔치를 베푸는 곳이였으며 민심을 살피던 자치기관 역할도 수행했다.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향사당은 봄과 가을 두 차례 고을 사람들이 모여 활을 쏘거나 잔치를 베푸는 곳이였으며 민심을 살피던 자치기관 역할도 수행했다.

제주성은 산업화 과정에서 대부분 개발되며 본래 자취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와 부분적으로 남은 성벽은 옛 성의 축성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성지에는 여러 유물유적, 유배인 적거터, 근현대 상징적 건축물 등이 남아있어 의미가 있다.

이번 질토래비 역사기행은 성내 유배인 적거터와 향사당을 둘러본다.

 

제주시 중앙로 국민은행 입구 북쪽 구석에 놓여 있는 광해군의 적거터 안내 표지석.
제주시 중앙로 국민은행 입구 북쪽 구석에 놓여 있는 광해군의 적거터 안내 표지석.

광해임금 등 여러 유배인 적거터 안내

서문인 진서루 주변에는 여러 유물유적이 있는데, 칠성대, 남강 이승훈 적거터 등이 있다.

특히 광해임금이 제주에 유배되었을 당시 이곳 주변에 적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광해임금의 적거터 안내 표지석은 현재 중앙로 서쪽 국민은행 입구 북쪽구석에 놓여 있다.

조선의 15대 왕인 광해임금은 인조반정에 의해 허망하게 정권을 내주어야 했던 불운한 군주이지만 매우 영특한 임금이었다.

비운의 임금으로 제주에서 그 생을 마감한 광해임금은, 아버지 선조(宣祖)와 어머니 공빈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1575년에 태어났다.

1608년 임금에 올라, 1623년까지 15년간 조선을 다스렸다.

광해는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형인 임해군을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 보내고 유영경에게 사약을 내렸다.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할 계획을 세웠던 광해임금의 앞날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613년 당시 정권 축인 대북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그리고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했다가 이듬해 죽게 했고, 1618년에는 이이첨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서인들의 집단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김류·이귀·김자점 등 서인들이 주도했던 인조반정에 의해 16233월 폐위당한 뒤 광해군으로 강등되었다.

서인들은 광해군의 조카인 종()을 옹립해 인조(仁祖)의 시대를 열고는, 광해를 비롯한 직계가족을 모두 강화로 유배하였다.

 

향사당의 옛 모습.
향사당의 옛 모습.

향사당과 신성여학교

지방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있는 향사당은 제주시 삼도2970-2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가을에 온 고을 사람들이 모여 예악덕행(禮樂德行)을 세우는 데 제일인 향사음례(鄕射飮禮) , 주연과 함께 활쏘기를 행하던 곳이다.

향사당(鄕射堂)은 당초 가락천 서쪽에 있었으나 숙종 17(1691) 김속(金涑) 판관이 찰미헌(察眉軒) 서북쪽인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정조 21(1797)에 유사모(柳師模) 방어사가 건물의 명칭을 향사당(鄕社堂)이라 편액(扁額) 했다.

임원으로는 좌수(座首:1)과 별감(別監:3)이 있었는데, 이후 지방의 자치기관인 향청(鄕廳)의 기능을 갖게 되면서 민심의 동향을 살피고 주민의 여러 가지 일들을 자치적으로 의논해 처리하기도 했다.

향사당은 고려 말과 조선 초 향리의 유력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에서 유래한다.

벼슬에서 은퇴한 관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향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세운 기구였다.

조선 초기 전국의 향사당은 관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됐으나, 후기 들어 관아 부근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제주 향사당 역시 같은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수령을 견제하던 기능에서 점차 수령을 보좌하는 역할로 변해 향청의 기능이 격하됐다.

조선 후기에는 향청의 우두머리인 좌수의 거처로 사용됐다.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으로, 1975년 제주도유형문화제 제6호로 지정됐다.

1981년 고쳐 지을 때, 길가에 인접한 관계로 동남향이던 것을 북동향으로 자리를 바꾸었고, 건물양식은 한식 일자(一字) 팔작지붕이며 툇간과 내진수 사이에 우물마루가 있고 바닥은 강회다짐을 했다.

기둥은 각주 밑흘림, 기단은 현무암 자연석을 이용하고 있다.

제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신성여학교가 이곳에서 개교했다. 190910월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 마르셀 라쿠루(한국명: 구마슬具瑪瑟) 신부는 향사당을 교사로 활용해 제주 최초의 신식 여자교육기관인 제주사립신성여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신성여학교의 운영을 위해 성바오로 수녀회 소속 한국인 수녀 2명을 초빙했다. 19141회 졸업생 6, 26, 316명을 배출했다. 포교활동 일환으로 교육사업에 뛰어든 창립자 라크루 신부가 전주성당으로 전출되자 학교는 재정난에 봉착했다.

19167월 학생 150여 명이 재학하고 있던 신성여학교는 설립 7년 만에 휴교를 하는 비운을 맞아야 했다.

일제는 학교 건물을 강제로 빼앗아 1916혼간지라는 일본 절을 세워 일본인 거류 사망자들의 유골 안치소로 이용했다.

광복이 되자 1회 졸업생인 최정숙을 중심으로 학교 재건을 추진한 결과 1946년 신성여자중학원이란 이름으로 향사당에서 다시 개교했다. 향사당에 학교가 들어섰지만, 미군정은 일본인 소유의 적산 건물로 취급했다.

신성학원은 법정 투쟁에도 환수를 못하였으나 졸업생들과 후원회 성금으로 건물과 부지를 되찾았다.

1949년 제주 신성여자초급중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았고, 최정숙이 교장으로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