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고 있는 내 목을 놓아줘라
밟고 있는 내 목을 놓아줘라
  • 제주신보
  • 승인 2019.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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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주 수필가

나는 반대한다. 미국 최초 여성대법관에 오른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차별을 없애고 누구나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지극히 논리적인 방법으로 상대를 설득하고 해결했던 여성이다. 그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이유로 모든 권리와 지위에서도 법적 차별을 받았다. 그리하여 부당한 대접을 받는 여성들을 대변해 조금씩 법을 움직이고 성차별이라는 오래된 관습을 개선하려 간단없이 노력했다.

제13호 태풍 ‘링링’이 다가오던 때다. 방송에서는 큰 피해가 없도록 미리미리 대비하라며 주의를 주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도 열리는 날이다. 후보자는 양심에 따라 사실 그대로 말할 것을 맹세한다는 선서문을 진지하게 낭독했다.

얼굴에는 긴장감이 돈다. 태풍이 화면 안으로 급습한 것 같았다. 인사청문회는 후보자의 자질과 도덕성을 검증하는 자리로 많은 질의와 대답이 오갔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실이 아닌지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위원들끼리는 서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며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파상공세로 이어지는 질의에도 후보자는 제한된 시간에 짧고 솔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유연하게, 때로는 눈빛으로.

태풍은 아직 잠잠했다. 어디선가 습한 바람이 불어 닥치고 나뭇잎은 살랑거렸다.

“밟고 있는 내 목을 놓아줘라. 여성은 왜 불공평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차별과 편견 없이 우리의 능력을 보장해 달라.”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강한 어조다. 함께 있던 남자 검사들은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일관성 있는 설명과 부드러운 표정 때문이기도 했다. 무관심을 관심으로 이끌어내는 절호의 순간이다. 드디어 이제 많은 여성들이 법 앞에서 보다 공정한 미래를 꿈꿔 보는 최초의 여성대법관이 탄생되는 자리다.

후보자의 짧고 긴 호흡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간간히 새어나왔다. 단지 호흡이었을 뿐인데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한 위원의 질의에 대답한다. “내가 만약 법무부장관이 된다면…최선을 다하겠습니다.”간결하게 자신의 소명을 밝혔다. 가족문제가 불거지면서 온갖 의혹을 받고 있던 후보자. 그는 한 달이 이십 년 같다는 말을 했다.

지극히 내성적이고 말이 없던 소녀. 무수한 말들이 안으로 녹아서 논리 정연한 변호로 사람들을 제압했다. 절대 화내면 안 된다는 어머니의 교육도 잊지 않았다. 조용히 사색에 잠기길 좋아하던 소녀. 친구들끼리 다툼이 생기면 곧바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명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켜주고 불평등을 평등으로 이끌어 줄 지도자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지지하고 따를 것이다. 공익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이야말로 존경 받을 자격이 있는 것 아닐까.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은 자유롭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

왼손에는 저울로 오른손엔 칼을 쥔 정의가 이 땅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내 목을 밟지 말라 외칠 수 있고, 당당히 자신의 소신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인정받는 세상이어야 한다.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꿈꾸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