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프레임에 담은 삶과 죽음…굿판으로 넋 위로했다
(104)프레임에 담은 삶과 죽음…굿판으로 넋 위로했다
  • 박형준 기자
  • 승인 2019.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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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남 작가가 1981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서 촬영한 ‘제주도 무혼굿’. 제주 바다에서 죽은 영혼의 넋을 건져내어 위로하고 저승으로 고이 보내는 의식이다.  [사진 제공=산지천갤러리]
김수남 작가가 1981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서 촬영한 ‘제주도 무혼굿’. 제주 바다에서 죽은 영혼의 넋을 건져내어 위로하고 저승으로 고이 보내는 의식이다. [사진 제공=산지천갤러리]

김성종金性鍾1915(일제강점기)~1945(일제강점기), 일본 오사카에서의 항일활동.

일본식 성명은 가네하라金原性鍾, 본관 나주, 구좌읍 평대리<-머리> 김여원金麗元3남이다.

그는 19381월경부터 밤에는 성심야학誠心夜學의 교사로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이 야학교는 이봉춘李奉春(우도)1934년부터 오사카 동성구東成區 저사야중猪飼野中의 가정집에 개설한 학습소로, 빈곤한 고향 자제들을 모아 한국의 실상과 독립 국가건설과 민족의식의 고양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봉춘, 김주삼金柱三(조천), 고갑팽高甲彭(삼도) 등과 함께 한국의 역사·한글·한국지리를 통하여 조국과 민족을 예찬하는 데 힘써서 독립국가 건설을 역설했다.

이와 함께 독자적으로 오사카 동성구 저사야서猪飼野西 천신天申구락부 옆, 그리고 동성구 중천정中川町 부근 등 두 곳에다 무명의 야학교를 개설하고 항일민족 의식 고양에 주력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김성탁金聖鐸1684(숙종10)~1747(영조23), 문신·유배인. 자 진백振伯, 호 제산霽山, 본관 의성, 김태중金泰重의 아들로 평안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728(영조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에는 의병을 일으키고, 창의소倡義所에서 토역문討逆文을 각 지방의 유문儒門에 보내어 의병에 가담할 것을 적극 권했다.

그 공로로 안핵사按覈使의 추천을 받아 참봉에 임명되었다.

1734년 어사 박문수朴文秀와 이조판서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다시 참봉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감진어사監賑御史 이종백李宗伯의 추천으로 사과司果에 기용돼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를 역임했다. 또한 상소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를 건의하고 왕도정치를 행할 것을 촉구했다.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합격해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이어서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했다.

1737년 이현일李玄逸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정의에 유배되었다. 이때 아들 김낙행金樂行이 부축하고 들어와 심부름을 하면서 부친의 마음을 달래니 그 효심에 많은 이들이 감복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문장가로 조정의 총애를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지지했다.

김성호金性昊1824(순조24)~1880(고종17), 한학자, 애월읍 납읍리<과납>에서 나주김씨 인충공파 28세손 김종한金鍾漢의 아들로 태어나 進士試에 합격, 자는 호연浩然, 호는 월암月庵, 1859년 진사시험 갑과에 합격, 후일 종제 김성찬金性燦(1826~1886)도 향시에 합격했다.

같은 마을 안에 연상의 선비 김용징金龍徵이 살았기 때문에 혼돈을 피하기 위해 김용징을 -진사’, 김성호를 족은-진사라고 불렀다. 김상언金尙彦은 그이 현손이다.

조천읍 신흥리 쇠물깍에 있는 신흥리분향기념비.
조천읍 신흥리 쇠물깍에 있는 신흥리분향기념비.

김성화金成華1850~1919. 일명 현화炫華. 호는 근암謹庵. 김해김씨. 조천읍 신흥리<->에서 김여윤金麗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전 교육감 김태혁과 법무사 김태현의 증조이다. 또한 명월진明月鎭 만호 김성집金成集의 아우이다.

김성화는 조천리와 함덕리의 위세威勢에서 벗어나 새로 일어난다는 이름으로서 신흥리를 독립해 분향分鄕했다. 곧 관곶이동館串以東을 말한다.

그는 1915년 을묘 112일 분향했는데 이는 마을 원로 김성화金成華와 이장 김해원金海元의 절대적인 노력이었다.

이후 193131일 서예가 김창하金昌河(노형)가 붓글씨로 써서 마을 향민鄕民 일동의 이름으로 신흥리분향비新興里分鄕碑를 세웠다.

김세완金世玩1894(고종31)~1973, 변호사. 제주지방법원장. 대법관. 황해도 신천信川군 신천信川면 사직리 출신, 무전無錢여행으로 세계 일주한 김찬삼金燦三의 선친. 평양고등보통학교 부설 교원양성소 1년을 수료했다. 신천信川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2년 재임한 후 경성전수京城專修학교에 입학하여 3년 후 졸업했다. 광복 후 세칭 제주의 3三大 청백리淸白吏로 김세완과 제주도지사 최승만崔承萬, 초대 교육감 최정숙崔貞淑을 꼽고 있다.

1967년 국민대학 학장을 거쳐 국민대학 재단인 성곡재단省谷財團 이사장을 역임했다.

1920년 부산지방법원 검사국 서기 및 통역관으로 피명被命되고 이듬해 재령載寧법원 서기로 재임 중 19256월 판검사 특별고시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이듬해 경기도 수원水原지청 판사로, 1932년 경성京城지법 판사로, 1934년 서울지법 인천지청 판사로 발령됐다.

193811월에 사임하고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변호사로 활동했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동년 10월 미 군정청 적산敵産관리국장으로 피명되었으나 반년 만에 그만두고 또 변호사를 개업했다. 1952421일 제3대 제주지방법원장으로 임명되어 15개월 재임하고 대법원 대법관으로 발탁됐다.

제주에서 법 집행을 공평무사하게 해 명법관으로 정평이 났다. 195810월 이기붕李起鵬 부통령 후보의 선거사무장 박모씨에게 실형을 내린 것도 김 대법관이었다. 박모씨는 집권당인 자유당 소속 현직 국회의원이며 국회 외무분과위원장이었다.

1심에서 유죄를, 2심에서는 무죄판결이 내려졌는데도 대법원에서 6개월 실형을 선고한 것이다. 이것은 김세완 대법관의 평소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을 잘 나타낸 판결문이다.

김수남1949~2006. 사진작가. 제주 출신. 그의 사진의 매력은 굿판에 참여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충실히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1982년작 여씨할망당 영등굿에서 잘 드러난다.

제주시 구좌읍에서 촬영한 이 연작連作에서는 구삼싱할망(제주 토속신앙에서 아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신) 역할을 맡은 심방(무당을 이르는 제주 방언)이 동네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장면과 삼신할망(자식을 점지해주고 보살펴주는 신)의 호령으로 마을 밖으로 쫓겨나는 모습이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쫓겨나는 구삼싱할망이 지팡이를 짚고 언덕을 넘는 장면은 넓은 허공과 오버랩되면서 구도자의 느낌마저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