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자연을 위한 올바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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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수, 한국사회과학연구회 이사장/논설위원

바다로 둘러싸인 섬사람들이 제 운명을 개척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환경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 일이다. 자연재해의 피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름대로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리고 외부세력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대비하는 일도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제주사람들은 외부의 침입에 대해 순종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때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외침보다도 더욱 심각한 일은 가진 자들이 내부 갈등과 소모적 정쟁을 일으켰다.

일본제국주의체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은 일본 패망과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났고, 미군정이 시작됐다. 미군은 새로운 지배와 점령정책을 제주섬에서도 여지없이 시행했다. 일제 강점기 행정관청에 근무했던 자들과 친일경찰들을 그 자리에 그대로 복무하게 했다. 미군정의 행정편의를 위해서였다. 이 시기 제주도민 사이에서 일어난 최초의 갈등은 좌우 이념 대결보다는 지역개발 자주화 논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통일독립국가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라는 중앙정치판에서의 대결구도보다도 앞서 제주 섬을 지금과 같은 제주도로 승격하자는 주장이 일부 토호와 유지로부터 제기됐다. 이들은 1945년 10월 도제실시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당시 제주도지사와 협조하면서 도승격운동을 추진했다. 제주섬에 미군정중대가 처음 진주하던 바로 그때였다. 이 도제추진기구는 제주지방의 지리 역사, 생활 실태 등을 들어 도로 승격하는 게 백년대계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제주도삼십만대표 근백배상서’로 시작하여 “조선군정장관 각하 귀하 제주도는 조선의 남단해외에 처한 가장 큰 섬인데 천후지리 인정물태가 남조선대륙과 수륙격원하와 판이한 감이 있어 유하니 가위 이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라는 진정서를 아놀드 미군정장관에게 발송했다.

이들은 진정서 제출만으로 미흡하다고 판단하여 직접 군정요인을 만나 탄원하려고 이 해 10월 29일 서울에서 군정장관에게 3개항을 건의했다. 첫째, 도승격 실현. 둘째, 노련하고 공정하고 지식과 도덕을 겸비한 사람으로 도장관을 임명하되 지방 인사를 고문으로 둘 것. 셋째, 제주와 목포 간에 대형여객선을 취항시켜 해상교통난을 해소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제주사람들은 통일독립국가 건설 이후에 추진해야 마땅하다면서 이런 게 그리 시급한 일이냐고 지적하면서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고 미군정의 분할지배를 우려했다. 1946년 6월 2일, 신임 군정장관 러치 장군은 제주섬의 실정 파악차 직접 제주를 방문하였다. 그 한 달 뒤 미군정청은 법령 제94호를 제정, 공포해 8월 1일부터 제주섬에서 도제를 시행하도록 했다. 이 조치는 일제가 1915년 도제를 실시한 뒤 31년 만의 일이었다.

제주섬이 명실상부한 제주도로 승격되면서 달라진 점은 제주도 행정구역이 2군 1읍 12면으로, 도기구가 3국(총무, 산업, 보건후생국), 12과로 늘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억압적 국가기구도 확대 개편됐다. 경찰기구는 1946년 9월 제주감찰서가 제주도감찰청으로 승격됐고, 제주읍 소재 제22구 경찰서는 제1구 경찰서로 개칭되고, 서귀포에 제2구 경찰서가 신설됐다. 그리고 미군정은 각 도마다 군대 신설 방침에 따라 모슬포에 국방경비대 제9연대를 신설하였다. 군대가 없는 평화와 생명, 인권의 섬을 구축할 수 있었던 도민들의 꿈과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제주도지사가 어떤 자인가에 따라 제주는 사람과 자연을 위한 올바른 길을 가다 말다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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