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숲에서 벗어나도 좋을 때
이제, 숲에서 벗어나도 좋을 때
  • 제주일보
  • 승인 2019.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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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심 수필가

보름을 넘긴 달이 떴다. 이우는 달빛에 그래도 선명하게 세상이 드러난다. 북적대던 낮의 일상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밤은 온다. 빛과 어둠으로 만물을 제패한 듯 조용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우주의 숨결. 그 맥박만이 뛰고 있는 태고의 시간이다.

 

장환이는 진짜 보약 같은 친구라. 어떻게 이걸 사다 줄 생각이 났을까?”

 

남편은 오늘도 여지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모기장을 걷고 안으로 쓰윽 들어간다. 아마 찬바람이 불어 두꺼운 이불을 꺼낼 쯤에나 모기장도 접고 저 얘기도 그만 두지 않을까.

장마가 끝나갈 무렵, 남편이 모기장을 들고 왔다.

모기에 물려 잠을 설친다는 소리에 친구가 오일장에서 사다 주었다고 했다. 오자마자 방안 네 귀퉁이에 고리를 마련하고 줄을 이어 모기장을 쳤다. 예전엔 여름이 되면 으레 등장하던 것이 언제부턴가 사라져 볼 수 없었던 모기장이다. ! 장방형의 모습이 또 다른 느낌으로 장식 되었다. 그 안에 들어가 눕자 아, 이건 푸근한 과거로의 환향이었다. 모기장하나 쳤을 뿐인데. 남편도 이제 모기 걱정 없이 잘 수 있겠다며 자리에 누웠다.

우와! 어릴 때 어머니랑 같이 잤던 생각이 나네.”

남편은 새삼 느껴지는 분위기에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는지 더 깊은 감탄에 빠졌다. 그 후론 매번 잠자리에 들 때마다 빠지지 않는 인사가 되어버렸다.

문명에 밀려 뒷전으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집이나 그 안의 세간살이들도 함께 숨을 쉬며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것 같다. 한여름 밤, 마당 한 구석에 타오르던 생풀의 매캐한 냄새의 모깃불, 모기장, 모기향 등 모기와의 전쟁이 오히려 여름밤의 풍경이 되고 향수를 느끼게 하는 걸 보면. 먼 곳에 있어도 가족의 숨결을 기억하고 체취를 느끼듯이 비슷한 물건을 보면 함께 했던 시간과 질감이 마음으로 느껴져서 더욱 그러한 게 아닐까.

 

며칠 아팠다. 늘 종종대며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보니 힘에 부쳤다. 딱히 정해진 직업적인 일이 아니어도 주부들은 집안일이나 가족들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하루 종일 많은 일을 하면서도 막상 무얼 하며 그리 바쁘냐고 하면 대답에 풀이 꺾인다. 당연한 듯이 하는 일들, 휴일도 없이, 병가나 연차도 없이 무급으로 온 힘을 다 쏟아내며 하는데 전업주부라 명하지만 아직도 노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아프다.

이러다 가면 어쩌지 하고 은근 염려되던 터였다. 감기려니 느슨하게 두었다가 기침 할 때마다 온몸이 뒤틀릴 듯 고통스러워 병원에 갔다. 몸이 아프니까 만사 젖혀두고 큰자로 뻗었다. 몸도 마음도 내 영혼까지 바닥에 내려놓고 불어오는 바람에 맡겨버렸다.

새털구름, 산들바람, 코스모스, 가을 햇살, 귀뚜라미, 잠자리, 도꼬마리……

어린 날 내 영혼을 쓰다듬어 주었던 것들. 눈을 감으니 아득하다. 한 번 쯤은 본 듯한데 꿈결인 듯 생시인 듯, 이제는 분간이 필요하지 않다.

골고루 내리쬐는 가을볕에 마음을 내걸고, 선선하게 불어오는 맑은 바람으로 켜켜이 풍욕을 하자. 그리고 저 산등성이에 올라 -하고 외치면, 멀리서 오는 메아리도 들을 수 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보약같은 친구야.” 잠꼬대로 하는 소리였는지 잠깐 뒤척이더니 금방 콧소리를 한다. 남편은 아마 모기장 안에서 함께 자던 어머니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며칠째 연거푸 해댄 풀베기 작업으로 온 몸이 힘들다고 아파했는데 입가에 미소를 물고 있다. 유년의 기억은 통증을 잠재워주는 마취제다.

또르르 또르릉울어대던 풀벌레도 잠이 들었다.

달빛으로 물든 사방이 적막하다. 영원으로 향해 있는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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