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교회로 명칭 변경 뒤 해체 전까지 제주 선교 사업 주관
책판고, 탐라지 등 책 목판 보관…다양한 서책들 출판돼
제주 원도심은 역사·문화를 품고 있는 장소다. 제주목관아를 비롯해 제주지역 최초로 들어선 성당과 교회를 비롯해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신성여학교의 터인 향사당, 유배인 적거터까지.
제주역사문화의 주요 유물유적 가운데 이번에 만나볼 탐라·고을·병담길의 주인공은 성내교회와 조선시대 책판고가 있었던 터이다.
1908년 개신교 목사로 처음 제주지역에 파견된 이기풍 목사는 1910년 원도심 소재한 출신청(出身廳) 건물을 사들여 성내교회를 열어 복음을 전파했다. 책판고는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향교안에 설치됐다가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성내교회(삼도2동)
1907년 조선예수교 장로회에서 이기풍(李基豊) 목사를 제주지역 선교사로 파견할 것을 결의했다.
그는 인천항을 출발해 제주로 오는 도중에 심한 풍랑을 만나 가족을 목포에 놔두고 홀로 제주로 향하지만 또다시 태풍을 만나 추자도에서 겨울을 지내고 1908년 2월에야 제주도에 도착했다.
그는 조선인 최초의 7인의 목사 중 한 명이다.
이어 그의 부인과 이선관(李善寬) 등이 파견돼 본격적인 포교 활동이 전개됐다.
산지천변 산지목골 안쪽의 초가 6칸을 매입해 교회당으로 사용하다 제주에 유배를 온 한말의 정치가이자 개화파의 거두인 박영효가 헌금 100원을 내놓자 이 돈으로 제주시 삼도2동 관덕정 맞은편 출신청 건물을 매입해 1901년 성내교회를 열었다.
출신청(出身廳)은 조선시대 병사들이 활을 쏘고 무예를 연마하던 훈련청이었다. 나중에는 무과 급제자들이 근무하는 관아로 사용됐다.
성내교회는 그 후 1941년 동부교회가 신축되자 그 이름이 서부교회로 바뀌었다.
1913년에는 평양종회에서 주관하던 제주도 선교사업이 근거지인 전라노회로 이관됐다.
그 후 1930년 11월 14일 전라노회에서 분립해 제주노회가 설립돼, 일제의 강압에 의해 1943년 9월에 해체될 때까지 제주의 선교 사업을 주관했다.
한편 성내교회에서 이기풍 목사 부인이 1912년부터 1917년까지 야간학원을 전담했으며, 1916년에는 6년제 과정의 영흥학교가 개설돼 1928년까지 운영됐다.
▲책판고
국내에서 오래전부터 활자가 개발됐지만, 제주지역은 19세기까지 주로 목판을 이용해 책을 인쇄했다.
탐라지 등 40여 종의 책이 인쇄된 목판이 모두 이곳 책판고에 보관됐었다고 전해진다.
책판고는 처음 향교 안에 설치됐으나 뒤에 교동인 생깃골 현 위치로 옮겨졌다.
제주지역에 책이 하사된 것은 1435년(세종 17) 9월의 기록이 처음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경, 예기, 역경, 춘추, 성리대전 등 각각 2권, 그리고 소학 10권이 하사됐다.
소학은 조선 초기 도서 정책과 관련해 가장 주목되는 책으로 성리학 이해의 기초 교재로서 유학교육의 필독서였다.
1493년(성종24) ‘제주에는 서적이 거의 없다.’라는 유자광의 상계에 의해 제주판관 김익겸에게 서책을 보내며 제주목사 이종윤에게 교육 장려를 위한 장문의 글을 내린다.
즉 ‘본주와 정의, 대정 등 3읍은 멀리 해중에 있어서 학문에 힘쓰는 이가 거의 적은 것은 오직 훈계해 의도하는 방도가 없는 것만이 아니라 서책 역시 얻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라면서 사서, 모시(毛詩), 소학 등을 각 3권씩 보냈다.
이원진 목사의 탐라지에 따르면 당시 제주도의 책판고에는 사서삼경 등 30여 종류의 서책이 비치되고, ‘탐라지도, 마의방’ 등 다양한 서책들이 출판되고 있었다. 특히 이원진은 성균관 전적을 지낸 고홍진에게 감교를 맡겨 탐라지를 발간하는 등 이 당시는 목판인쇄술이 일정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호부터 질토래비 역사문화탐방길은 일제 강점기 때 사라졌지만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동성·돌하르방길을 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