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율되는 배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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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진 수필가

올해 아버지께서는 아흔을 이태 앞두고 농사에서 손을 뗐다. 지난 6월, 수확한 마늘 한 포대를 넘겨주며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말을 꺼냈다. 참 오래 하셨다.

평생 바지런한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 주시던 아버지. 이제는 해가 중천에 뜨도록 늦잠 주무시는 게으른 아버지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상상을 한다. 노을이 예쁜 날 아버지와 함께 동네 해안가에 즐비하게 서 있는 카페에서 이방인처럼 커피 주문하고,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여유롭게 바라보는 모습을. 바람이 있다면 어느 카페를 가든 나이 듦에 눈치 주는 곳이 없었으면 좋겠다. 혹여 그런 떨떠름한 눈길과 마주친다면 아버지와 딸의 설렌 발걸음은 씁쓸한 추억을 간직해야 한다.

몇 달 전 SNS 상에서 갑론을박의 뉴스거리가 있었다. 어느 식당 유리문에 붙은 “49세 이상은 정중히 거절합니다.”라는 안내문. 노 키즈존에 이어 노 시니어 존이 나왔다고 떠들썩했다. 개인사업자의 권리라는 주장과 이유 없는 차별을 조장한다는 의견들이 팽팽히 오갔다.

혼자 가게를 꾸리는 주인이, 이삼십 대는 그러지 않는데 나이 든 고객들은 말을 자주 걸어와 장사하기 힘들어 안내문을 내걸었단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수긍이 간다. 한데 내 나이가 그 테두리 안에 속해서인지, 아니면 앞으로 이런 곳이 하나둘 늘어날 것 아닌가 하는 군걱정 탓인지 영 개운치가 않았다.

아이를 방치해 놓고선 문제를 일으키자 적반하장으로 갑질하는 무개념 부모들로 인해 일부 카페나 음식점에 노 키즈존이 생겨났다. 이를 시작으로 변형된 노 ○○존이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한다. 노 중학생존, 노 비거주아동존, 노 커플존, 노 장애인존 ….

안타깝다. 몇몇 몰지각한 사람들로 인해 어느 특정한 계층이 잠재적 무개념으로 구분되면서 배제된다는 게. 접근을 거부당하는 순간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모멸감을 느낄 것이다. 그게 내가 될 수도, 가족 중 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누구를 위한 경계선일까. 이런 선긋기가 당연시된다면 머지않아 불협화음이 일상인, 공감 능력이 상실한 건조한 사회와 맞다닥뜨리게 될 것이다.

공감은 타인의 시선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비싼 자동차를 타거나 명품 옷으로 다른 이들의 이목엔 신경 쓰면서, 정작 자신이 편하고자 한 행동이 남들에겐 어떻게 보일지 헤아리는 데는 몹시 둔감하다.

아빠 혼자 아이를 돌보는 ‘슈퍼맨은 돌아왔다’라는 TV프로가 있다. 어느 날 외국인 아빠인 샘 해밍턴은 처음 극장에 가게 되는 아들인 윌리엄을 위해 집에서 미리 그 낯섦을 겪게 했다. 커다란 종이 상자 안에 들어가 정면에 뚫린 구멍으로 TV를 보게 한 다음 팝콘을 건네며 음식을 흘리면 안 되는 것과 큰 소리 내지 말아야 함을 아이 눈높이에서 설명했다. 배려란 무엇인가를 생각게 하는 장면이었다.

어떤 장소든 그곳만의 예의가 있다.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목소리만 옳다 소리 높인다면 손사래 치며 도리질하는 구역이 보란 듯 나타날 것이다. 우리에겐 지금 조율되는 배려가 필요하다. 역지사지에 대해 곱씹어 봐야 한다.

사람은 다 그 나름의 가치가 있어 존중 받아 마땅하다. 차별을 부추기는 ‘노 ○○존’은 ‘NO’라야 한다. 온기 나는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꽉 잡고 있어야 할 끈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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