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목(巨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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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 아는 덕을 지녔다. 나무는 고독을 알고 견디며 즐긴다. 나무에게는 달과 바람과 새 같은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을 차별 대우하는 법도 알고 그들이 오고감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나무의 가장 좋은 친구, 서로 이웃하고 진심으로 공감하는 나무들이다”

이양하의 수필 『나무』의 도입부를 요약했다. 키워드는 ‘덕’, 무릇 나무는 덕을 지녔다는 유의미한 메시지를 담았다. 작가는 그가 마음속으로 바라는 인간상을 의인화해 나무에 빗댔다.

수령 백년이리라. 내 유년의 집터엔 그때 집 어귀에 있던 유일의 팽나무가 지금도 버텨서 있어, 액자 속의 풍경같이 머릿속에 각인됐다. 평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녀 내게는 하나의 상징구조처럼 된 나무다. 이따금 찾아가 팔 벌려 안고 어루만지면 가마득한 옛 추억을 실타래처럼 풀어 주곤 한다. 매미가 새카맣게 붙어 동네를 뒤흔들던 소리가 지금도 귓전이다. 무더운 여름이면 소년에게 그늘로 있던 나무다. 갖은 풍상을 견뎌내 이젠 거목이 됐다.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 그중에 호·불호는 있다. 잡목 따위는 취할 게 못되고 특히 거목을 선호한다. 오랜 세월을 두고 비바람과 뜨거운 햇볕과 불타는 가물, 한겨울 폭설을 이겨내어 거목이다. 굵고 훤칠한 높이에 다른 무엇보다 그 당당함, 깊은 뿌리와 현란한 꽃과 탐스러운 열매를 좋아한다. 그뿐 아니다. 거목에게서 받는 감동이 있다. 아래로 들어서는 순간, 훅 하고 얼굴에 끼얹어 온몸을 싸고도는 강한 기(氣). 때로는 오싹할 정도로 두려움과 섬뜩함에 한기를 느낀다. 분명 나무가 발산하는 바로 그 기다. 나무가 살아 숨 쉬며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봄철이 되면 거목은 소방차로 수십 대 분량의 물을 빨아올려 싹을 틔운다고 한다. 나무에서 기를 내뿜는다는 확실한 증거다. 용문사 은행나무가 이런 경우다. 높이 42m, 둘레 14m나 되는 이 나무는 일본군이 불을 질렀지만 타지 않았고, 나라에 이변이 있을 때는 크고 이상한 소리를 낸다. 6·25, 4·19, 5·16 때가 그랬다 한다. 수령이 1100년이라니 나무가 그 나이로 노거수(老巨樹)가 되면 이미 신목(神木)이 다 돼 있는지도 모른다.

수령 백년 이상이면 마을의 전설과 옛일을 간직하고 있다고 보는 데는 그만한 연유가 있을 법하다. 제를 지내는 당제목(堂祭木)이거나 마을의 수호신으로서의 존엄성을 의당 갖게 된다는 의미다. 비단 특정 나무에 국한하지 않는다. 산중턱에 우뚝 선 거목을 올려다보노라면, 하늘이 덮쳐오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킨다. 한순간에 압도되는 거목의 위의(威儀)야말로 바라보는 사람을 전율하게 한다.

오늘로 〈제주新보〉가 창립 74돌, 백년이 시야로 들어온다. 모두들 축하해야 할 경사스러운 날이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 1945년 〈제주민보〉로 창간하면서 신문을 박아낼 종이조차 없어 전전긍긍, 심한 경영난에 허덕였던 고난의 한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야 시대의 궁핍이다 치고, 이후 감내해야 했던 잡다한 시련도 적잖았을 테다. 더욱이 최근 몇 년 이래 신문의 존립기반을 흔들던 사안에 종지부가 찍힌 것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정의는 진실 편이다. 곧은 낭은 바로 선다. 어간에 〈제주新보〉는 거목으로 자랐다. 나이만 들지 않았다. 아픔 속에 나무의 ‘덕(德)’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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