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좌수반장학회’ 설립자…인재양성 기금 수억원 쾌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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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문, 을묘왜변 때 왜적 격퇴 김수성, 형조참의·호조참의 등 역임
김수익, 제주목사 등 지내 김순겸, 제주서예가협회·영주연묵회 회장
김순오, 서귀여고 교감…여성교육 앞장 김순자, 김만덕봉사상 수상
좌수반문화재단 회장 故 김순자 여사(사진 왼쪽부터 네 번째)가 2008년 12월 국제로타리 3660지구 제주중앙로타리클럽에 장학금을 기부하고, 도내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주중앙로타리클럽 제공]
좌수반문화재단 회장 故 김순자 여사(사진 왼쪽부터 네 번째)가 2008년 12월 국제로타리 3660지구 제주중앙로타리클럽에 장학금을 기부하고, 도내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주중앙로타리클럽 제공]

김수문金秀文?~1568(선조1), 무신. 제주목사. 본관은 고령, 자는 성장成章. 중종 때 무과에 급제. 1546(명종1) 동래부사가 되어 그해 관리로서 근면, 절검하고 특히 치민治民에 힘써 가자加資되었다.

1549년 김수문은 김해부사가 되어 구황에 힘써 포상을 받았다. 그는 평소 책읽기를 좋아했으며, 탐라에서 왜적을 몰아내고, 서북으로는 호인을 물리쳐 나라의 간성이 되었다.

그는 1555년 을묘왜변 때 70명을 뽑아 적진에 돌입시켜 승리를 거두고, 그로서 가자, 이듬해 6월 또 가자되었다.

1558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어 1565년 한성판윤漢城判尹에 특진되고, 같은 해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 호인胡人의 침입을 격퇴, 북변 방어에도 공을 세웠다.

1556(명종11) 여름 6척을 포획하는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2)로 승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는 영광을 얻었다. 김수문은 임금의 배려에 감열感悅1556년 겨울 연희각延曦閣 동북쪽에 망경루望京樓를 지어 어의御意에 보답하는 뜻을 표했다.

김수성金遂性?~1546(명종1), 문신. 제주목사. 자는 유초有初, 본관은 청풍, 김세영金世英의 아들.

김수성은 1519(중종14) 기묘사화 때 대사헌 조광조趙光祖가 심정沈貞 등의 모함으로 투옥되자 성균관 유생으로 그 석방을 탄원하다가 주동자로 몰려 유배되었다. 후에 풀려나와 1533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또다시 복직되기를 여러 번 했다. 그 뒤 홍문관부응교·사헌부장령·홍문관응교 등 주로 삼사의 언관직을 지냈다.

1525(중종20) 식년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15376, 제주목사 심연원沈連源의 후임으로 도임, 15383월에 선친의 노환으로 떠났다.

1537(중종32) 형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홍문관부제학이 됐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경기도·황해도관찰사를 역임했으며, 1541년 정시에서 동부승지로 수석을 차지했다.

김수익金壽翼1600(선조33)~1673(현종14), 문신. 제주목사. 본관은 안동, 자는 성로星老, 호는 청악靑岳, 아버지는 좌찬성 광위光煒이며, 1630년 별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1649(인조27) 9, 목사 김여수金汝水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도임하고 1651(효종2) 7월 파직되었다.

그는 성균관 전적을 거쳐 지제교知製敎와 삼사三司의 직을 역임했고, 1645년 응교應敎를 거쳐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지냈다. 1648년에는 병조참의에 임명됐다.

1666년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임명되어 잠시 부임했다가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목사 김공수익 청정비牧使金公壽翼淸政碑가 현재 조천 비석거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김순겸金順謙1932(일제강점기)~2008 금성, 서예가, 연묵회 이사장, 호는 근재謹齋 혹은 효농曉農, 광산김씨 36세손, 문간공파 세걸공世傑公, 애월읍 금성리<모실-> 김창세金昌世의 아들.

고량부삼성高梁夫三姓문화재단이 주는 탐라문화상을 수상, 논문으로 제주서예발달의 사적고찰등이 있다.

그는 죽암竹巖 고순흠高順欽을 사사私事하여 서예계書藝界에 입문해 국전國展에 입선, 제주서예가협회 회장을 지냈다.

1965년 제주 최초의 서예단체 영주연묵회瀛洲硏墨會창립 시에 실무를 맡아 회원전會員展, 휘호揮毫대회, 서예 강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고, 양중해梁重海박사의 뒤를 이어 사단법인 영주연묵회瀛洲硏墨會 이사장을 지냈다.

그는 영주연묵회瀛洲硏墨會 회장 재임 중에 병몰, 평생 제주서예 발전에 힘썼다.

특히 그는 망원산방望圓山房 서실書室에서 쓴 모충사 건립문’, ‘김만덕 묘비명’, 우도牛島해녀항일기념탑 비문’, 해병대사령부의 충무공의 난중일기 글씨등 대작大作을 남겼다.

김순오金順五()1927(일제강점기) ~2014, 여자 장학사 및 중등 교장.

본관 경주, 한림읍<舊右> 한림리<-수풀> 태생이다.

영어통역관인 오라버니를 따라 중국 타이완’<臺灣>으로 들어가 기륭基隆고등여학교를 거쳐 타이페이’<臺北>여자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본도 최초의 장학사로서 여성교육과 도덕교육에 힘을 쏟았다.

서귀포여고 교감, 제주교육청 예절교육관장을 지내고 제주사대 부고 교장을 김찬흡에 인계했다.

이어 공동체의식개혁 주도협의회 부회장과 서귀포西歸浦문화원장을 지냈다.

그녀는 국민훈장 동백장과 국민포장을 받았다.

김순자金順子()1917(일제강점기) ~2012, 장학사업 운영, 본관은 김해, 조천읍 신흥리<->에서 태어나, 애월읍 금성리<모실-> 출신 의사 좌수반左銖盤과 혼인을 맺었다.

서울에서 남편의 개업의開業醫를 돌보더니 19506·25로 남하南下, 부산에서 부부 함께 밀항으로 도일渡日했다.

남편은 일본에서 다시 의사자격 시험에 합격, 자신은 일본대학을 졸업, 인술仁術로 재력을 모아 1989년 남편이 타계하자 고향에 들어와 199410억원을 내놓아 재단법인財團法人 좌수반장학회를 설립했다.

이에 2001년 김만덕金萬德봉사상을 수상, 한편 금성리와 친정 마을 신흥리 두 복지회관福祉會館 건립에도 거금을 희사, 2005년 국제로타리 3660지구 제주중앙로타리 회원으로 12000만원을 출연 좌수반문화재단 장학금을 지급, 이를 합쳐 매년 5000여 만원을 장학금과 각계에 지급했다.

그녀는 2005~2006년까지 장학생과 복지단체에 6억여 원을 지급했으나 당시 이사장이 횡령 착복함으로써 재단이 위기에 이르러 다시 10억 원을 출연出捐했다.

그녀는 2009년 귀향해 애월면사무소에서 당년 분 장학금 5000만원을 수여하고 남편의 출신 학교인 애월涯月초등학교를 찾아 동창회에 1000만원을 쾌척했다.

남편 좌수반은 애월교 제2회 졸업생이다. 조카 좌창우左昌雨를 양자로 삼아 손자 좌세준左世俊이 사법고시에 합격, 서울에서 변호사업辯護士業을 한다. 장학회 업무는 친정 조카 법무사인 김태현金泰鉉에 의해 운영된다.

한편 시가媤家 마을에는 좌수반·김순자 부부 송덕비, 친정 마을에는 김순자송덕비가 세워졌다.

필자의 변 : 당시 이사장의 잘못 운영으로 출연금 10억이 날아갔고, 김여사가 10억원을 재출연再出捐2009년 애월로 오신다기에 찾아가 처음 만났고 좌수반의 출신학교인 애월초등학교를 찾아가도록 안내역할을 했다.

김여사는 모교에 1000만원을 전달했고, 기금은 모교 동창회에 보관 중이니 오는 2023년 개교 100주년 기념일에 사용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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