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종, 비밀 결사 혁우동맹 가담해
김순탁, 제주청년동맹 집행위원장
김순희, 조선학생전위동맹 활동
김승호, 제주대 농과대학장 등 역임
김시곤, 해녀 생존권 보호 앞장
▲김순재金淳在:1916(일제강점기)~1971, 조천소년단의 항일 활동. 김영종金英鍾의 아들, 산북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조천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1년 1월 1일 신년 축하식을 거행하는데 학생 전체가 일본 국가國歌 및 칙어봉독가勅語奉讀歌를 부르지 않았다.
학교 당국에서는 주동 학생 김봉택金奉澤 등 7명을 퇴학 조치, 나머지 5명에게 정학 처분, 이들은 모두 조천소년단 소속이었다.
이 일로 당국에 의해 검거되어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하니 동년 9월 26일 징역 1년 6월에 4년간 집행 유예를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 광복절에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순종金順鍾:1899(광무3)~1972, 제주의 혁우동맹 항일 활동. 자는 익성翼成, 호는 고봉孤峰, 본관은 김해, 구좌읍 하도리<별방>에서 김용서金龍瑞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0년 3월 구좌면 일대에 새로운 항일 비밀 결사 혁우革友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신재홍申才弘의 주도하는 급진적 성격을 띤 단체였으며 소집책임을 김순종이 담당하였다.
김순종은 체포됐고 1933년 2월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즉시 항소했다.
해방 직후 구좌면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구좌면 세화리에서 잡화상을 경영했다.
▲김순탁金淳鐸:1895(고종32)~1938(일제강점기), 야학夜學 활동 및 기미년 조천 만세 운동 항일 활동. 호는 양천養泉, 본관은 김해, 조천읍 조천리에서 진사進士 김우종金禹鍾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6년 3월 25일 항일동지 박두규朴斗圭와 함께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신명사숙新明私塾(숙장 김태호)의 교사로 안세훈, 박두규와 함께 민족정기를 고양시켰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조천에서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하기로 결의, 3월 21일부터 동 24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조천·신촌·신흥·함덕 등 4개 마을에서 항일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이때 그는 일경에 체포돼 동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칙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1928년 8월 제주청년동맹 조천지부가 50명으로 조직되며, 집행위원장에 피선되었다. 제주청맹 가운데 가장 활발하다고 인정받은 이곳에서 김순탁은 김시추, 김서호, 윤창석, 김지환 등과 함께 1929년 후반부터 노동야학勞動夜學을 실시했다. 이 노동야학은 진학하지 못한 많은 청소년·소녀들을 계몽시키고 독립 사상을 파급시켰다.
1930년 2월 14일 경찰은 신좌문고新左文庫를 비롯해 다수의 집을 수색, 김순탁, 윤창석 등의 맹원盟員을 검거, 대구복심법원에서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다.
1938년 3월 12일 병사하니 동년 10월 벗 안요검安堯儉(일명 世勳)이 비문을 짓고 우인友人과 문하생들이 비석을 세웠다.
▲김순희金淳熙:1908(융희2)~1933(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학생전위동맹 항일 활동. 남원읍 남원리<금롯-개>에서 김계윤金桂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순희는 1929년 3월말 경 서울의 사립 중앙고보中央高普에 재학 중 정관진丁寬鎭, 김태래金泰來, 한경석韓慶錫 등과 함께 1927년 3월 조직한 비밀 결사 조선학생혁명당을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 확대 개편하고 중앙집행위원 및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이 동맹은 1929년 5월부터 6월에 걸쳐 서울 관훈寬勳동에서 중앙위원 회의를 개최하고 세포 조직인 독서회를 각급 학교에 결성하도록 했고, 동년 11월말 정종근鄭鍾根, 김태래金泰來 등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으로 체포된 학생들의 즉시 석방과 식민지 교육정책을 반대하는 격문을 작성해 배포할 것을 논의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다 일경에 체포됐다.
김순희는 1931년 4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 형(구형 6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3년 12월 3일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승호金承浩:1928~. 평안북도 영변 태생, 1950년 6․25 이후 제주에 정착, 제주대학 수의학과를 졸업해 건국대 대학원을 마쳐 1985년 일본에서 대학원을 수료, 제주농고 교사와 제주대 교수를 거쳐 농과대학장을 역임했다.
▲김시곤金時坤:1901(광무5)~1983, 독립운동가, 제주의 혁우동맹 항일 활동. 정치가. 본관은 김해, 호는 한천汗泉. 방송인 김택환金澤煥의 선친, 제주도지사 김태환金泰煥의 숙부. 그는 산북 구좌읍 세화리 출신. 서울의 시립 배재培材고보에서 수학, 1928년부터 사립 하도下道보통학교의 교사로 다년간 교편생활을 했다.
1933년 2월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즉시 항소,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청년운동으로, 또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에 대해 비판하면서 민주당에 입당, 야당 생활의 험난한 길을 택했다.
제주 해녀에 대한 인권 유린과 수탈 행위가 심해지자 1930년 세화리 문도배文道培의 집에서 오문규吳文奎, 강관순康寬順, 김성오金聲五, 김순종金順鍾, 김시곤金時坤, 부대현夫大炫 등은 신재홍申才弘의 주도하에 결속해 비밀 결사 혁우革友동맹을 조직했다.
해녀들의 권익 옹호와 투쟁 및 지원과 수탈 방지 및 독립군 자금의 조달을 위해 1인당 10원씩을 헌금하기로 결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1932년 1월 7일 9개 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해녀 1000여 명이 동원된 세화細花 집단 시위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일경에 체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