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재일여공보호회 조직…日 착취로부터 교포 여성들 도와
(107)재일여공보호회 조직…日 착취로부터 교포 여성들 도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시범, 조천 만세운동 적극 이끌어
김시성, 광주고보 성진회 항일 운동
김시숙, 제주여자청년회 조직 앞장
김시엽, 조선방직 동맹파업 때 활약 
김시용, 소년 문맹퇴치 운동 실천해
1981년 제주시 황사평 묘역에 고수선(사진 맨 왼쪽)을 비롯한 친우, 제자 등이 ‘강평국 선생 추도비’를 세우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시숙 지사는 고수선, 강평국 등과 함께 제주여자청년회를 조직, 여성 지위 향상과 여성 계몽운동을 펼쳤다.
1981년 제주시 황사평 묘역에 고수선(사진 맨 왼쪽)을 비롯한 친우, 제자 등이 ‘강평국 선생 추도비’를 세우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시숙 지사는 고수선, 강평국 등과 함께 제주여자청년회를 조직, 여성 지위 향상과 여성 계몽운동을 펼쳤다.

김시범金時範1890(고종27)~1948,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의 항일 활동. 본관은 김해, 조천읍 조천리<梨洞>에서 김진호金振鎬4남으로 태어나 뒤에 김주호金周鎬의 아들로 입양됐다.

조천의 독립만세 운동은 1919321일부터 324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의 핵심인물 14인의 동지 중 김시은과 김시범이 최고형을 받았다.

미밋-동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도 바로 김시범이었다.

1차 시위에서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3명의 부상자가 발생, 13명이 연행됐으며, 이 중에는 14인 동지 가운데 김시범·김시은·김용찬·고재륜·김형배·황진식·김장환·김경희·김희수 등 9명이 포함됐다. 그는 19195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천항일독립기념관 구내에 있는 김시성의 묘비.
조천항일독립기념관 구내에 있는 김시성의 묘비.

김시성金時成1909(융희3)~1935(일제강점기), 광주학생운동 시에 광주고보 성진회醒進會 항일 활동. 호 석연石淵, 본관 김해, 조천읍 조천리<梨洞>에서 월방月舫 김창호金昌鎬의 차남으로 태어나 할머니 송씨와 중부仲父 김인호金仁鎬에 의해 길러졌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영어학교에서 배우던 중 조국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고, 광주고보 재학 당시 성진회醒進會 활동을 했던 그가 성진회의 재건을 시도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성진회 동지들은 월 1~2회씩 몰래 회합하면서 사회과학 이론을 연구하고 그 실천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29113일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면서 그에 관계된 혐의로 일경에 체포됐다.

그는 19316월 대구복심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조천공동묘지에 있는 김시숙의 묘비.
조천공동묘지에 있는 김시숙의 묘비.

김시숙金時淑1880(고종17)~1933(일제강점기), 일본 오사카에서 재일본여공在日本女工보호회·여공노동소비조합의 항일 활동. 본관 김해, 조천읍 조천리<梨洞>에서 태어났다.

그는 40세 이후에야 글을 배워 신여성으로 활동, 1925년 최정숙崔貞淑, 고수선高守善, 강평국姜平國, 이재량李載良 등 여성들과 함께 여성 지위 향상과 여성 계몽운동을 펼쳤다. 이들과 함께 제주여자청년회를 조직, 본도 초기 여성 운동가로 활동했다.

한때 조천리에서 여성 야학을 개설해 항일적인 내용을 가르쳤다고 조천경찰관주재소에서 검거돼 조사를 받고 항상 요시찰要視察대상으로 감시를 받았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많은 교포 여성들이 일제에 의해 착취당하는 것을 목격, 곧 재일여공보호회를 조직해 나약한 교포 여성들을 보호했다.

또 재일여공노동 소비조합을 조직, 회장으로서 여성 근로자의 상호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게 하고 또 여공들의 복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무정부주의 선봉장 고순흠高順欽(조천)이 신진회를 창립해 반민족 교포단체 상애회相愛會·조선인협회 등과 대결할 때 김시숙은 신진회에 가입해 여성부의 책임자로서 고순흠의 항일책략을 적극 도왔다.

고순흠은 13세 연상인 김시숙의 남성다운 성격과 의협심에 항상 존경심을 보내었다.

1933년 여름 일본 오사카 적십자병원에서 54세를 일기로 타계, 고인의 업적을 기리어 제주 출신 여성 근로자들이 모두 어머니를 잃은 듯 호곡號哭하며 선각여성 김시숙 호상護喪부인회를 조직해 고유제告由祭를 거행한 후 제주도로 반장返葬, 운구해 조천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김시엽金時燁()?~1944(일제강점기), 조선방직 동맹파업과 혁명적노동조합 전국협의회 부산지방최고협의회의 항일 활동. 본관은 김해, 조천면 조천리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고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징역 8월을 언도, 1968년 건국공로를 인정받아 독립장을 받은 애국투사이다.

그는 부산청년동맹과 재부산 제주학우회에 가입, 19301월 조선방직공장 노동자 총파업 때 격문을 뿌리는 등 항일 운동 관계로 체포돼 이 무렵 동향의 독립운동가 김시용金時容과 서로 남몰래 접촉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 193192차 혁명적노동조합 전국협의회 부산지방최고협의회의 항일 운동에 관계하고 있었다. 그때 동래東萊에 살고 있었는데 부산 양말공장의 직공職工조합 간부로 활약 중 검거되었다.

김시용金時容1906(광무10)~1945, 조천소비조합 운동 및 조선공산당 항일 활동. 본관은 김해, 산북 조천리<梨洞>에서 김태호金泰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무정부주의 사상가 죽암 고순흠高順欽의 생질이다.

김시용은 김문준金文準·강창보姜昌輔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순국한 항일 공산주의자로서 제주가 낳은 삼걸三傑이라 불린다.

그는 죽암의 영향으로 항일 운동에 투신했다. 부친이 설립한 조천의 신명의숙新明義塾을 졸업하고 서울의 사립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그는 조천리의 신진청년 김성온金成溫, 김시균金時均 등을 중심으로 192551일 메이데이(국제노동절) 날을 기하여 오일회五一會를 조직, 그 첫 사업으로 무산소년을 위한 노동학원을 설립해 61일부터 개원, 한글과 산수를 가르치면서 문맹퇴치 운동을 몸소 실천했다. 이는 전국적으로 처음 개설된 노동야학勞動夜學이라고 한다.

그는 한때 삼양三陽의 개량서당 기성期成사숙에서 교원으로 재임했다. 한편 부친 김태호金泰鎬는 선각자로서 존경받아 192410월 조천면장으로 추대됐으나 아들의 항일 활동으로 19265월 면장직을 자진 퇴임했다. 김시용은 1925년 제주도의 첫 사상 단체 신인회의 창립 멤버이며 1926년 도쿄 와세다<早稻田>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해 재학 중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했다. 또 재일본在日本 조선노동총동맹에 참여했다.

194281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 금고禁錮 1년을 선고받았다.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945723일 오후 6시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815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