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성과 성 밖을 잇는 주요 교통로 역할
제주성과 성 밖을 잇는 주요 교통로 역할
  • 제주신보
  • 승인 20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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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천 서쪽에 형성된 제주성…을묘왜란 때 동쪽 고지대 포위 당해
1565년 곽흘 목사, 약점 보완해 ‘동성’ 쌓아…주민 식수문제도 해결
이후 동문인 ‘연상루’ 일대 일컬어…육지 왕래·물자 수송 등 이뤄져
1910년대 남수각에서 바라본 제주성의 모습. [사진 출처=제주100년 사진집]
1910년대 남수각에서 바라본 제주성의 모습. [사진 출처=제주100년 사진집]

동성(東城)은 제주성을 동쪽으로 확장하며 쌓아졌다. 동성이 생겨난 직접적인 동기는 1555년 발생한 을묘왜란 때문이었다.

당시 을묘왜란에서 아군은 크게 승리했지만 제주성의 취약점들을 발견했다. 성 내부는 저지대인데 반해 성 동쪽은 높은 구릉으로 둘러 있어 성내가 적에게 완전히 노출된 것이다.

주성의 확장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곽흘 목사는 을묘왜란 10년 뒤인 1565년 제주성 동성을 쌓았다. 이후 동성은 동문인 연상루(延祥樓) 중심으로 한 일대를 일컬었는데, 산지천 동쪽의 성내가 이에 해당된다.

이번호에서는 산지천 동쪽 일대에 있었던 동성, 남북수문 등의 역사기행을 따라가본다.

 

동성(東城)을 쌓은 까닭은

조선시대 초기 제주의 주성은 산지천 서안에서 병문천 동안에 형성되어 있었다. 제주에 고성이 처음 언제 지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보면 탐라국시대부터 고성이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조선시대 초의 주성에 관하여 제주읍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4394척이며 높이가 11척이고, 성내에는 솟는 물이 없고 성 남쪽에 큰 돌 아래 큰 구멍에서 물이 솟아나는데 가락쿳물(嘉樂泉)이라 했으며 깊이는 1(10, 3m)이다. 따로 중성을 쌓아 성중 사람들이 물을 떠 마실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따라서 이때까지도 제주성은 산지천 서쪽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1653년 발간된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가락천에 중성(重城)을 쌓아 성내 사람들이 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뒤 제주성은 확장하게 되는데, 이때가 1565년 곽흘 목사 재임 시이다.

탐라지등에는 제주읍성은 돌로 쌓았으며 길이가 5489, 높이 11척이며, 격대 27, 타첩 404개로 되어 있다. 3문과 남북 수구에 2문이 있다.

본래 대촌(大村)으로 삼성(三姓)이 살던 곳이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의 성은 지금의 북성교(北城橋) 동안(東岸)으로부터 시작해 기상청, 동문파출소, 운주당 남쪽, 소래기동산을 거쳐 남수각 동안으로 이어진 성곽으로 추정된다.

제주성은 1925년 제주항 축항공사가 시작되면서 헐리기 시작했다. 동성이 가장 늦게 헐렸는데, 일제강점기 말에도 남아 있다가 해방 이후 산업화를 거치며 완전히 파괴되었다. 1960년대 후반 이후의 노인들 기억 속에는 또렷이 남아 있는 성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제주성벽의 모습. 제주성은 1925년 제주항 축항이 시작되면서 대부분 헐렸다.
현재 남아있는 제주성벽의 모습. 제주성은 1925년 제주항 축항이 시작되면서 대부분 헐렸다.

동성(東城)과 을묘왜란

동성(東城)이 생겨난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으나, 직접적인 동기는 을묘왜란 때문이었다.

1555년 전라도의 영암, 강진, 달량 등을 침범했다가 조선군의 반격으로 쫓겨난 왜구들은, 그 해 6월 제주성을 공격하러 몰려왔다. 40여 척의 선단으로 화북포에 상륙한 왜구 1000여 명은 제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을묘왜변 시 왜군은 지금의 동문로터리와 사라봉 사이에 있는 높은 언덕에 진을 치고, 제주성안을 내려다보면서 공격했다. 이런 지형지물을 이용한 왜군의 기습공격으로 초기에는 관군이 상당한 열세에 처했다. 당시의 제주목사 김수문은 이러한 상황을 역이용하는 책략을 발휘하는데, 읍성을 방어하면서 별동대 70명을 조직하여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이 작전이 적중하여 왜선 9척을 빼앗고, 수백 명의 적을 사살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 3일째 되던 날, 정로위 김직손 등 병사 70명으로 편성된 특공대가 남수각에 포진하고 있던 왜구들을 역공했고 크게 승리했다.

을묘왜란에서 아군은 많은 전과를 거두고 크게 승리했지만 반면 취약점들이 드러났다.

적이 제주성을 포위했을 때 제주성 내부는 저지대인데 반해, 성 동쪽은 높은 구릉으로 둘러 있어 성내가 완전히 적에게 노출된다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거의 모든 샘이 성 밖 산지천 유역에 있어 장기전일 때는 성내 사람들이 식수문제로 곤란을 겪게 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주성의 확장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곽흘 목사는 을묘왜란 10년 뒤인 1565년 제주성을 동쪽으로 확장하여 동성(東城)을 쌓았던 것이다.

동문(東門)과 남북수문(南北水門)

조선시대에서는 제주성내를 성문을 중심으로 구분했다. 동성은 동문인 연상루(延祥樓) 중심으로 한 일대를 일컬었는데, 산지천 동쪽의 성내가 이에 해당된다.

남성은 남문인 정원루(定遠樓) 일대, 서성은 서문인 진서루(鎭西樓) 일대의 성내를 말한다. 북성은 길이 없어 성문이 없었지만, 산지천이 흐르는 수문인 북수문(北水門)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말한다.

산지천 남쪽에도 수문이 있었는데, 언덕에 제이각(制夷閣)이 있는 이 일대를 남수각(南水閣)이라 했다.

그 동쪽으로는 사람이 살지 않았고 서쪽과 남쪽으로 집들이 들어서 있어, 사람들은 주로 서문과 남문을 이용했다.

동성 확장공사를 하면서 먼저 한 것은, 동쪽으로 나 있는 길에 성문을 쌓는 일이었다. 이 길은 제주성의 정면을 관통하는 간선도로로, 주 보급로이고 주 교통로였다.

제주도는 인적 왕래를 비롯해 가축의 수송, 생활물자의 보급이 육지와 해로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동문은 제주성과 성 밖을 잇는 주 교통로였던 셈이다. 해로의 주 교통항은 화북포와 조천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사의 도이임(到離任)을 비롯해 육지를 왕래하는 모든 사람들의 출입과 물자의 수송은 이 길을 통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