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판 살인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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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동철, 사회부장

경찰이 무기수로 복역 중인 이춘재에게 DNA 증거를 들이밀자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며 33년 만에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범행을 시인했다. 과학기술의 진보와 첨단 장비로 무장한 과학수사 기법에 결국 꼬리가 잡혔다. 오늘날, 물건을 만지기만 해도 남게 되는 미세한 피부세포와 각질도 10억분의 1 농도까지 검출이 가능해졌다.

10년 전인 2009년 2월 제주시 애월읍 고내봉 인근 농업용 배수로에 보육교사 이모씨(당시 27세)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성폭행 시도 흔적과 목이 졸린 시신으로 ‘제주판 살인의 추억’으로 떠올랐다.

이씨는 평소 늦은 귀가 때마다 택시를 타고 애월읍 집으로 갔다. 그런데 실종 신고 일주일 만에 집에서 4㎞ 떨어진 배수로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사건 당일 새벽에 용담동 남자친구 집에서 나온 이씨의 통화 내역과 이동 거리를 감안, 평소처럼 택시에 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5000여 명의 전 택시기사가 용의 선상에 올랐다.

통신수사와 택시 운행기록계의 이동 거리를 확인한 결과, 경찰은 10여 대의 택시로 범위를 좁혔다. 1곳을 제외한 나머지 3곳의 CCTV 영상은 흐릿했지만 2009년 당시 도내 법인택시 중 노란색 캡등이 달린 흰색 중형택시는 18대에 불과해 용의자를 10여 명으로 압축했다.

경찰은 진술을 자주 번복했던 A씨를 유력 용의자로 지목했다.

경찰은 2009년 2월 A씨의 택시 좌석과 트렁크에서 여러 개의 섬유조직을 발견했다. 피해자의 신체 5군데와 치마와 가방에서도 실오라기와 같은 섬유조직을 확보했다.

10년 전에는 미미했던 ‘미세 증거물’ 증폭 기술은 나날이 발전했다. 특히 이 사건을 계기로 섬유조각(실오라기)까지 분석하는 과학수사 기법이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섬유조각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했다. 피해자의 옷과 소지품 등에서 택시기사 A씨의 셔츠와 유사한 진청색 섬유가 다수 발견됐다. 뒷좌석과 차안에서는 피해자가 입었던 ‘무스탕’ 점퍼의 동물섬유가 확인됐다.

사망 추정시간에 이어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2018년 12월 A씨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올해 7월 제주지법은 1심에서 A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CCTV 영상의 화질이 좋지 않아 영상 속의 차량이 A씨의 택시라고 단정할 수 없고, 대량 생산·사용되는 면섬유의 특성상 피해자가 아닌 다른 승객이 남긴 것일 수도 있어, 혐의를 입증하기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즉, 사건 현장에서 나온 미세섬유가 서로 유사할 수는 있지만 ‘똑같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택시 안에서 DNA와 지문 등 직접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무죄에 힘이 실렸다.

이 사건의 항소심 첫 공판은 지난 9월 25일 열렸다. 검찰은 피해자가 입었던 ‘무스탕’ 점퍼의 동물섬유를 더욱 정밀하게 분석할 예정이다. 또 미세섬유에 대한 ‘유사성’ 대신 ‘동일성’을 입증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특히 CCTV를 분석할 도구와 기술이 발달돼 화면을 더욱 정밀하게 쪼개서 분석할 계획이다.

그간 A씨의 행적은 어땠을까. 2010년 9월 제주에서 강원도로 떠났으며, 2015년에는 소재지 불명으로 주민등록이 말소됐다. 2018년 5월 경찰이 재수사에 착수했다는 기사가 보도된 날 휴대전화로 ‘보육교사 살인사건’과 ‘유의미한’ 단어 의미를 검색하기도 했다.

이승에서 꽃피지 못하고 살해당한 보육교사의 영혼은 구천을 떠돌고 있다. 가족들은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보육교사의 원혼을 풀어주기 위해선 반드시 진범을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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