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은, 조천 만세운동 주도
김시존, 제주도립의원 내과 과장
김시진, 신성여학교 초대 교장 부임
김시추, 제주청년동맹 조천지부 활동
김시탁, 과도정부 입법의원
▲김시우金時宇:1875(고종12)~1918(일제강점기), 한학자, 조천리 한문서당의 항일 활동. 한학자. 자 강녀剛汝. 호 만취晩翠. 본관 김해.
김시우는 조천읍 조천리 이동파梨洞派 김씨 김진호金振鎬의 장남이며 김시학金時學의 맏형이다.
그는 조천 선비 해은海隱 김희정金羲正의 문하생으로 일찍부터 박학능문博學能文했다.
심재心齋 김석익은 그가 한창 나이에 타계하자 ‘곡김시우哭金時宇 만취晩翠선생’이라는 7언시를 지어 슬퍼했다. 그 첫 시귀에 “조년성가압동영早年聲價壓東瀛:일찍이 떨친 명성은 제주도를 압도했네”라고 만취의 사람됨을 높이 평가하였다.
1919년 3월 만취의 소상날 조카 김장환金章煥(서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천 만세운동을 계획했던 곳이 만취의 집이었고 주동 세력도 만취의 근친 즉 해김海金 이동파梨洞派의 열혈청년들이었으며 또 만취의 서당 문하생들이 주도했다.
그리고 만취의 집터를 금산琴山이라고 불렀고, 금산 밑에 서재가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만취 선생의 옛 집터였다.
만취가 타계하고 19년이 지나 그 문하생들과 아들 김윤환金允煥이 주축이 돼 금산을 잘 정지해 금대琴臺라 이름 짓고 또 동향 문인인 김형식金瀅植이 “선생의 존재는 산처럼 우뚝하더니 선생이 이승을 뜨자 산처럼 적적하네. 돌을 다듬지 않더라도 금대는 또렷또렷 그대의 높은 뜻이오. 우러러 대명臺銘도 역력하오”라는 명銘을 지어 세웠다.
▲김시은金時殷:1887(고종24)~1957,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 항일 활동. 본관 김해, 산북 조천리<梨洞>에서 김봉호金奉鎬의 3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농산聾山.
김시은은 1919년 3월 21일부터 3월 24일까지 조천읍 조천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14명 중의 한 사람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또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시존金時存:1917~1980. 의사, 제주도립의원 내과 과장, 김해김씨 梨洞派, 조천면 조천리 김지호金志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1930년 애월보통학교를 마쳐 도일, 浪速중학을 1934년 마쳐 일본대학 전문부에 재학하다가 평양기성箕城의학강습소로 들어가 1937년 수료했다.
이후 경성제대 부속병원에서 임상臨床공부를 하고 1942년 의사검정에 합격, 1945년 전남도립병원 제주의원의 내과 및 소아과 과장 역임, 1949년 5월 해군사관학교 중위로 임관되어 부산사령부에서 근무했고, 1950년 12월 예편되었다. 김시존은 제주시 일도1동에 홍제洪濟의원을 차렸고, 1966년 구좌읍 세화리로 의원을 이전했다. 부인 이난성李蘭成 사이에 5남4녀를 두었다.
▲김시진金時晋:1867(고종4)~1950(분단시대), 교육자. 신성여학교 초대 교장, 자는 민숙民叔, 호는 낙원樂園, 본관은 김해, 조천읍 조천리<梨洞>에서 김경호金慶鎬의 장남으로 태어나고 송지옥宋之玉의 사위.
1909년 10월에 프랑스의 신부 구마슬具瑪瑟에 의해 초등학교 과정인 사립 신성여학교가 개설됐고 그는 이때 초대 교장으로 부임, 1911년 4월 5일 교장직을 그만두었다.
당시 프랑스 성聖바오로 수녀회 소속의 김金아나다시아 및 이李곤자가 두 수녀가 신성여학교 교사로 복무하기 위해 1909년 11월 28일 제주에 도착, 1911년 4월 5일 김아나다시아 수녀는 제2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사립 초등학교를 태동시키기 위해 제주명신학회가 조직됐고, 이때 회장에 김시진이 선출됐다. 이후 1923년 3월 사립명신明新학교가 개설됐다.
이 무렵에 제주금융조합 감사 및 평의원 중 김시진은 문창숙文昌淑, 강해진姜海晋과 함께 전선全鮮금융조합연합회로부터 포상금 60엔円을 받는 등 그는 한때 금융업에도 관여했다.
▲김시추金時秋:1902(광무6)~1945(일제강점기), 조천리 노동야학夜學을 통해 항일 활동. 본관은 김해. 김찬호金贊鎬의 4남, 산북 조천리<梨洞>에서 태어나 청년운동에 헌신했다. 초등교장 김진환의 선친.
당시 제주청년동맹의 조천지부는 청맹원靑盟員들이 소년운동의 지도, 여성 계몽운동 등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벌였다.
제주청맹 조천지부는 제1회 정기총회를 1929년 8월 15일에 개최하기 위해 준비위원장 김시추를 뽑고 동 8월 12일 집회허가원을 가지고 조천경찰관주재소에 제출했더니 차일피일 늦추고 8월 21일에야 진행 하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러한 일제 당국 처사에 분노한 청맹원들은 1929년말경부터 노동야학을 개설해 글을 모르는 소년·소녀들에게 국어·일본어·산수 등을 가르쳤다.
이와 같이 민족계몽운동을 전개, 조천지부의 집행위원장 김순탁金淳鐸을 비롯해 김시추, 김서호金瑞鎬, 윤창석尹昌錫 등 청맹원들은 야학을 통해 항일 활동을 전개했다.
▲김시탁金時鐸:1911(일제강점기)~1948(미군정기), 개업 의사, 과도정부의 입법의원立法議員, 조천읍 조천리에서 김태호金泰鎬와 어머니 고유흠高柔欽의 아들로 출생하고 독학으로 의사 검정시험에 도전, 한지限地의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남조선 과도정부의 입법의원, 그는 1942년 조천리에서 개업, 해방 후 1946년 6월에 발생한 콜레라 창궐猖獗시에는 퇴치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이 무렵 구좌면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김金은 인민위원회 출신이라 해 내외에 관심을 끌더니 동년 11월 10일 상경해 동 13일 민전회관民戰會館에서 기자회견을 자청, 입법의원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강경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1946년 10월 29일 전국적으로 실시한 남조선 과도정부의 입법의원立法議院 선거에서 구좌면 인민위원회 위원장 문도배文道培(39:세화)와 조천면 인민위원회 문교부장 김시탁金時鐸(36:조천)이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