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새로운 역사 서술과 이행기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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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수, 한국사회과학연구회 이사장/논설위원

한때 고립무원의 섬에서 오직 제주학살(1947. 3. 1-1954. 9. 24.)과 4·3봉기의 실체와 진실을 찾아보기 위해 시작했던 진실공동체가 있다. 제주4·3연구소(소장 허영선 시인)는 그런 움직임의 중요한 하나의 거점이었다. 이번 4·3연구소 주최 학술회의는 새삼 진실공동체 확장과 심화를 힘주어 강조하는 듯하다. 하나는 개소 30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김영범 교수가 제기한 제주학살과 4·3봉기에 관한 광범위한 재해석과 의미부여, 과감한 제주 역사의 비판적 재구성 제안이다. 다른 하나는 제주4·3 제71주년 기념회의에서 언급된 특정 희생자 배제문제의 해결 방안이다. 이 양대 문제는 앞으로 제주 역사를 전면 재해석하고, 이행기 정의를 실현해 나가는 데 반드시 극복해야 할 제주섬의 과거와 현재, 미래사와 직결된다.

무엇보다 새삼스럽게 읽히는 대목은 제주현대사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걷어내고, 내재적 접근을 해야 한다. 이런 새로운 접근을 통해 당시 제주도민들의 자주적 행동과 실천을 살펴야 한다는 데 있다. 동시에 중앙집권국가 중심의 경직된 관변 역사 이해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범박한 역사 접근 역시 성찰한 내용은 과감히 반성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런 새로운 시각에서 제주 역사를 다르게 본다면 “4·3은 승리의 역사이다…‘제주 독립항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제주사회에 팽배해 왔던 수난사나 대비극의 역사만이 아니라 다른 시각, 다른 서술,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특히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은 4·3 봉기 주도자에 대한 해석 문제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끝까지 당당하지 못했다”라는 지적이다. 잘 아시다시피 초기 군사행동을 주도했던 자는 5개월 만에 섬을 떠났다. 그 다음 10개월 뒤 또 다른 다음 봉기 주도자도 죽었다. 봉기 이후 15개월 동안 버텨왔던 지도부 궤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들은 항복하지도 않고, 도피하지도 않고, 자살하지도 않는 불굴의 저항자세로 일관했다. 이들은 얼마든지 타협하거나 도주하거나 자결할 수 있는 절대시간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다른 선택지를 택하지 않았다. 물론 중앙정부 군경과 타협할 여지도 없었고, 귀순 권고만이 하늘에서 던져질 뿐이었다. 따라서 봉기 참여자들의 행동 양식과 요구, 주장에 대한 새롭고 자세한 접근과 해석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행기 정의 실현을 위해 재발방지책을 강구해야 한다. 제주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했던 초기 발상은 군대가 없는 비무장 평화의 섬으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소망과 미래비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강정마을앞에 동아시아 최대 규모로 제주해군기지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항공산업이 침체기임에도 불구하고 제2공항을 건설하려는 국책 사업 강행은 곧바로 공군남부탐색부대, 즉 공군기지 신설로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매우 불길하다.

제주 역사를 되돌아 생각해 보라. 이런 군사기지 신설 강요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배은망덕한 조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일본군 주둔과 미군정, 제주도 승격, 육지경찰 증강 등은 제주도가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모두 군사적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들이었다. 그 결과 군경은 횡포와 억압을 반복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주사람들의 저항하고 분노가 폭발한 게 바로 이 4·3 봉기의 한 측면이었다. 그런데 탈분단시대의 평화 만들기라는 구도에서 본다면 제주군사기지 신설과 확대는 도저히 수용할 수도 없고, 납득할 수도 없는 반역사적, 반인권적, 반평화적 최악수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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